멕시코 아카풀코의 휴양지에 정박한 한 작은 어선에 몸을 의탁한 채 자고 있는 고양이는 태평해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병들고 굶주려 있었다. 어쩌면 녀석은 어부가 물고기를 잔뜩 잡아오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105일간의 세계동물조우기록 2.남미편

남미에서 동물은 사람과 함께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미국에서의 시간을 뒤로 한 채 남미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북태평양을 건널 때와 달리 바다는 무척 잔잔했다. 기상담당관 말로는 적도에 가까워질수록 수온이 올라가고 연안을 따라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덕분에 바다를 대하는 우리 마음도 한층 여유로워졌다.

 

이후 기항한 멕시코와 콜롬비아, 페루, 칠레는 미국과는 모든 면에서 다른 국가였다. 마약과 내전, 가난과 정치적 암투로 점철되는 이들 국가의 역사는 남미 고유의 문화와 결합해 오늘의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동물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도 낯설게 만들었다. 산업화된 사회의 시각에서 본다면 남미는 그저 이국적으로 보이거나 어쩌면 더럽고 저급하게 비춰질 수 있지만 나는 남미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을 느꼈다. , 이제 남미의 길에서 마주친 생명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날아든 손님

 

콜롬비아를 떠난 우리 배는 갈라파고스 제도와 남미 대륙 사이 바다에서 페루로 향하고 있었다. 갈라파고스! 지구상 얼마 남지 않은 천혜의 자연 보고를 이렇게 스쳐지나가다니, 아쉬움이 마구 밀려왔다. 하지만 올바른 목적 없는 방문은 개인의 욕심에 그칠 뿐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 나는 갈라파고스 제도가 인간의 개입 없이 오랫동안 지금의, 아니 지금보다 더 풍성한 생태계를 유지하길 바라며 아쉬움을 달랬다.

 

당시 나는 밤바다에 흠뻑 취해 있었다. 일몰 때면 간판에 올라 낮과 밤의 교차를 바라보곤 했다. 태양은 활활 타오르며 낮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밤은 어김없이 하늘을 잠식했다. 밤이면 뱃전을 때리며 흰 물보라와 무지개를 내보이던 파도는 오직 소리만 남았다. 도무지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어디까지가 배이고 어디까지가 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갑판을 밝히는 불빛마저 미치지 못하는 은신처로 숨어들어 밤이 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의관 김 연중 대위, 함수* 보고

(함수는 함, 즉 배의 선두갑판을 말합니다. 배의 갑판은 보통 함수갑판, 중갑판, 함미갑판으로 구성됩니다.)

 

함장님으로부터 호출.

함수라니, 대체 무슨 일일까.

 

우리 배에 온 손님이니 잘 치료해주게

 

함장님은 내게 한 마디 하시고는 함장실로 돌아가셨다. 손님? 치료? 웅성웅성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바다 새 한 마리가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와 부리부리한 눈,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어디 해적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영락없는 대형 육식 새였다. 나는 우선 사람들부터 물렸다. 야생동물에게는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조차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물러가 고요해진 함수에서 녀석을 차근차근 살폈다.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변이나 다른 분비물은 모두 정상이었고, 부러지거나 뽑힌 날개깃도 없었다. 다소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건장한 몸으로 미루어 보아 오랫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지낸 건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 검사를 진행하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배에는 새를 위한 진단기기가 없었다. 나는 이틀 정도 차도를 지켜보기로 했다. 야생동물에게는 때로 안정이 최선의 치료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한 채 성급히 치료하려 덤볐다간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었다. 개입의 필요가 분명해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허가 없이 함수로 들락거리지 말라고 전했다. 사람들은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바닷새를 살리라는 함장님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화가 귓전에 울렸다.

 

굳이 치료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바다에 던져버리지 함장님도 참

 

그러게 말이야. 배에 괴질이라도 돌면 어쩌려고 말이야.”

 

나는 항변할 수 없었다.

오래부터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기에…….

 

학부생 때부터 수의사란 한쪽에서는 동물을 살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동물을 죽이는 직업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수의사는 철저히 이윤을 따져 소와 돼지 같은 산업동물의 생사를 결정하는가 하면, 같은 반려동물이라도 여러 사정에 따라 안락사를 권하기도 한다. 동물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동물 중에서도 반려동물, 그중에서도 자본에 따라 생명을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은 수의사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현실에 떠밀려 생명을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부끄럽고 두려웠다. 처음에는 성경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창세기 말씀은 모든 생명을 위하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데, 사람들은 그저 함부로 동물을 사육하고 살육하며 지나치게 많은 육식을 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함수로 나갔다. 함수는 다른 갑판과 달리 피할 불빛조차 없다. 난간에 의지한 채 칠흑 같은 밤을 헤치고 바닷새 앞에 섰다. 사실 녀석이 그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씩 무언가 움직이는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나와 바닷새, 단둘뿐이었다. 아니, 하늘과 바다, 나도 녀석도 하나의 밤이었다.

 

다음 날, 바닷새는 하늘로 훨훨 날아갔다. 잠깐 쉬었다 간 거였을까. 어쩌면 녀석은 이 배 저 배 옮겨가며 뱃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던져주는 꾼일지도 모른다. 지금쯤 녀석은 어디에 있을까? 잠시 잊고 있던 상념에 나를 빠뜨렸듯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지는 않을까? 한국에 돌아와 새를 잘 아는 선배 덕분에 녀석의 정체를 알았다.

 

바로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푸른발얼가니새였다.

 

멸종위기에 처한.

 

페루로 가는 길, 갈라파고스 제도와 남미 대륙 사이로 배가 항해하고 있을 때 함수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역삼각형 근육질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과 날카로운 부리, 땅땅한 가슴팍의 이 새는 멸종위기에 처한 푸른발얼가니새였다.

 

페루의 리마, 사람과 동물이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곳

 

우리 배는 어느덧 페루의 수도 리마에 기항했다. 입항 첫날, 나는 산크리스토발 언덕에 올랐다. 정상에서 바라본 리마는 척박했다. 남태평양에서 밀려온 습한 대기와 거리를 가득 메운 낡은 차에서 피어오르는 매연은 한데 뒤섞여 회갈색 메마른 땅을 무겁게 내리깔고 있었다. 건물 하나하나는 남미 특유의 알록달록한 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가난의 매서움 때문일까, 산에서 바라본 리마는 오히려 흑백에 가까웠다. 리마 외곽은 더욱 참담했다. “리마 밖은 정말이지 사람과 동물 태어나는 게 구분 안 갈 정도로 못 산답니다다소 과장 섞인 말이라 여겼던 교민의 말은 사실이었다.

 

산을 내려가려는데 한 남자가 나를 멈춰 세우더니 손으로 목을 그으며 말했다. “자네들 이 시간에 걸어 내려가면 변을 당할 수 있어. 이 산은 리마와 외곽 빈민촌의 경계지역이라 범죄가 속출한다네. 기다리면 차가 올라올 테니 그걸 타고 가시게실제로 페루는 그랬다. 가난은 어김없이 범죄를 키워냈다. 그날에만 여럿 소매치기를 당했단다. 여행자가 단 하루 만에 이토록 여실히 가난을 체감할 정도인데 이곳 사람들에게 가난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진해항을 떠난 이후 머릿속은 온통 동물로 가득했다. 연신 카메라에 동물을 담는 나를 볼 때마다 전에 남미에 와 봤던 치과 군의관은 연중이 남미 가면 정말 신나겠어. 남미는 사람 반 개 반이라는 말이 딱 맞는 곳이거든이라 말하곤 했다. 실제로 남미는 그랬다. 리마 거리는 사람뿐 아니라 개로도 북적였다. 그것도 대부분 고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큰 개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들어선 남미, 가난한 페루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한참을 돌아다닌 후에야 동물을 인지할 수 있었다. 개들은 너무도 자연스레 북적대는 군중 사이에 섞어 살고 있었다. 사람과 나란히 걸어가는, 함께 앉아 음식을 먹는, 떡하니 상점 앞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개는 이곳의 일상 풍경이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은 고국에도 흔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목격한 개는 반려동물이 아닌 길에서 살아가는 개다.

 

나는 언덕에서 내려와 대통령 궁과 리마 대성당이 위치한 아르마스 광장에 앉았다. 한 마리 개가 슬며시 다가와 나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나도 녀석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마음속으로 같은 걸 물었다.

 

너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니. 조금 더 이해하고 싶어.

 

이 질문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해 왔을까. 녀석들도 똑같이 우리에게 물어왔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이, 더 오랫동안 그래왔을지도. 거짓을 모르는 녀석들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기특한 마음에 녀석을 쓰다듬었다. 한데 두터운 털 사이 피부에 올록볼록한 뭔가가 가득했다. 진드기. 온 몸 구석구석 살 오른 기생충이 녀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광장의 다른 개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대부분 병들고 굶주려 있었다. 리마에서처럼 거리에 개가 많은 환경은 기생충에게 그야말로 천국일 터. 녀석은 진드기가 야금야금 자신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걸 알고나 있을까? 아마도 왜 자신이 말라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이따금 가려움만 느끼며 평생을 살아왔겠지. 앙상한 숙주와 오동통한 기생충의 불쾌한 공존은 그곳의 일상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건강도 위협한다. 사실 예전에는 왜 수의학에서 인수공통감염병(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감염될 수 있는 감염성 질환)이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마에 들어선 나는 그 이유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리마는 각종 인수공통감염병을 전달하는 이와 옴, 진드기와 같은 기생충이 거리의 수많은 개를 통해 아주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이다. 더구나 동물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남미 사람들의 태연한 생활방식은 그 위험성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기생충이 가득한 개가 뒹군 풀밭에 누워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진드기를 하나하나 뜯어주는 사람도 있다. 바로 인수공통감염병이 기생충을, 그리고 다시 개를 매개로 사람을 감염시키는 형국. 고국에서 이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곁에 있는 군의관들은 그런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위생관념이 없는 거야. 워낙 힘들게 사니 뭐가 위험한 건지도 모르는 거지하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내가 본 광경을 모두 설명하진 못한다.

 

문득 미국이 떠올랐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개와 고양이를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좋지 못한 무엇으로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선……. 길고양이가 거리에서 나고 자랄 수 없도록 물과 음식, 보금자리를 제공하지 말자던 캘리포니아의 유기동물정책을 차갑게만 느꼈던 내가, 거리엔 헐벗은 동물 하나 없고 있다면 사람의 품에서만 살고 있는 아름다운(?) 미국의 모습에 씁쓸한 시선을 던졌던 내가 페루에선 도리어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개와 고양이가 자생한다는 게 이런 모습일 줄은 몰랐다. 나 또한 극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자란 사람일 뿐이었기에.

 

출항 날 아침, 리마의 한 커피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다. 산크리스토발 언덕에서 나를 멈춰 세웠던 바로 그 남자였다. “여기서 자네를 만나다니! 아차, 그때 내 소개를 안했군. 나는 마르코, 여기는 내 아내와 자녀들이야. 나는 국영방송국에서 일한다네. 그날은 언덕 위성안테나에 문제가 생겨서 올라가 일하는 중이었어.세상 좁다는데 내 세상은 정말 좁은가 보다. 미국 톰 할아버지에 이어 페루 마르코라니. 나는 그에게 페루 동물을 보고 느낀 바를 말했다. 처음에 그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하긴, 그도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내 시선이 낯설었을 터. 마르코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가 말했다. “이미 리마에서 개들은 자생하기 시작한지 오래라네. 이는 아마 남미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에게 개는 해코지할 대상도, 그렇다고 보듬어야할 대상도 아닌 그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라네. 허허, 어찌 보면 자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거일수도 있겠지. 특히 위생관념에 있어서는 변해야할 부분이 많을 거야.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모든 게 자연스럽다는 거지. 인위적인 건 하나도 없어. 사람과 개 모두 자기 나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머리로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마치 서로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인 마냥 깊이 공감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내게는 페루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나는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댔지만, 사실 무얼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출항 후 사진을 돌아볼 때는 그 막막함이 더욱 짙어졌다. 그 중 마주침이라 이름붙인 사진이 있다. 산크리스토발 언덕 아래 노점의 한 노인과 개를 찍은 사진인데,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페루의 또 다른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때 묻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먹을 걸 바라는 개에게 '기다려, 내가 먼저 먹고 남은 걸 줄께. 지금은 안 돼'하는 동작을 취하는 노인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당시 나는 셔터를 누른 후 멍하니 그 둘을 바라봤다. 개와 노인 사이에는 서로를 잇는 무언의 끈이 있었다. 나는 지금껏 보지 못한, 결코 인위적이거나 계약적이지 않은 동물과 사람 사이의 오묘한 관계를 리마 골목골목에서 느꼈다. 그 중에는 마주침의 훈훈함과 달리 슬프거나 비참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내게는 그 순간 하나하나가 그립다. 분명 고국, 그리고 미국의 반려동물은 리마에서보다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고 있는데도. 왜일까……. 막막함과 혼란을 고스란히 안은 채 우리 배는 칠레 발파라이소에 도착했다.

 

 

배고픔에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는 고양이는 결코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한다지만 역시 남미의 도심도 동물에게는 살아가기 적합한 곳이다. 하루빨리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

 

 

 

 

개와 고양이는 본래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은 근거 없다! 남미에서 개와 고양이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사람과 동물을 접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공격적이지 않다. 노력하지 않아도 함께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개와 고양이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다. 이 개처럼 가려움에 제 몸을 물ㅇ뜯는 녀석이 한 둘이 아니다. 어디 피부뿐이랴, 그 속의 아픔은 더 클 것이다.

 

 

 

 

 

 

 

리마 시내에서 바라본 산크리스토발 언덕

산크리스토발 언덕 정상에서 바라본 리마 시내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동물과 마주하지만 그 마주침은 노상의 노인과 개의 그것과는 달리 대부분 차갑고 메말랐다. 우리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마주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발파라이소는 골목도 많고 모퉁이도 많고 숨겨진 것도 많은 곳이다.

산동네에서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산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무엇을 못 먹고 무엇을 못 입는지 세상이 다 안다.

집집마다 내걸린 빨래와 끊임없이 늘어나는 맨발의 아이들은

벌집 같은 판자촌에서도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칠레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의 하 대목

 

칠레의 발파라이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동네의 자유로운 생명들

 

칠레 수도 산티아고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발파라이소는 남태평양을 마주하는 해안산맥에 드넓게 펼쳐진, 어쩌면 그 아기자기한 소박함 때문에 도시보다는 산동네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곳이다. 해군기지를 비롯한 각종 금융·행정기관이 위치한 저지대와 달리 고지대 전역에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는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표현처럼 오래전부터 판잣집 가득한 빈민가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리마와는 왠지 모를 다른 느낌이 있는 곳이다. 다채로운 색과 개성 있는 낙서로 꾸며진 슬레이트 판잣집과 구불구불한 골목, 저지대와 고지대로 끊임없이 서민을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동네로 만들었다.

 

시간의 털을 덮고

부싯돌처럼 껄끄러운 혀로

정열적이면서도 메마른 사랑을 나누며

고양이처럼 잠들고 싶어.

그리고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

열정의 욕망으로

꿈속에서 쥐를 쫒기 위해

지붕과 풍경을 넘어

세상을 향해 몸을 활짝 젖히고 파.

 

-詩 <고양이의 꿈> 中, 파블로 네루다

 

나는 매일 아침 골목과 모퉁이 사이사이 숨겨진 보물을 찾아 나섰다. 지금 돌이켜보면 네루다가 말한 보물은 아마도 고양이가 아닐까 싶다.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거나 우아한 몸짓으로 판잣집을 넘나드는 고양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곳의 시간을 멈춘 범인은 바로 녀석들이 아닌가 싶었다. 네루다가 자신의 시 <고양이의 꿈>에서 말했듯 나는 어느새 고양이처럼 자고, 고양이처럼 꿈꾸고, 고양이에게 꿈을 맡기고 싶다는 꿈을 꾸며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오랜 동안 거리의 개와 고양이를 살피고 싶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나는 같은 골목, 같은 모퉁이에서 같은 개, 같은 고양이를 만났다. 사실 그렇게 같은 장소에서 같은 녀석들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주민들은 이따금씩 문을 열어 거리에 밥을 내어 주거나, 집에 들이기도 했다. 심지어 집 밖으로 고양이를 내보내 동네 개들과 어울리게 하는 집도 있었다. 혼잡한 리마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개와 고양이는 물론 이를 바라보는 나조차 사람과 차에 치여 매순간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긴 리마뿐이랴…….

 

물론 터질 것만 같은 몸뚱이를 밖에 내놓은 채 머리를 피부에 박고 있는 진드기는 발파라이소에서도 흔한 존재다. 보살핌 받지 못하는 개와 고양이는 이곳에도 많다. 하지만 녀석들은 리마에서보다 조금 더 안정된 모습으로 하루하루 각자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들을 대하는 주민들의 친근함은 반려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발파라이소 거리의 개와 고양이는 반려동물인 동시에 들개이며, 길고양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로 어떤 개념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생명일지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거리의 개와 고양이를 대신할 말은 없을까. 반려동물처럼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단어 말이다. 그렇다면 반려동물이란 또 무어란 말인가. 우리는 개와 고양이에게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 하는 짝이나 동무를 뜻하는 반려라는 이름표를 붙였지만, 아직까지 생명을 애완동물 취급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 더 나아가 애완동물이나 반려동물이란 개념에 갇힌 채 생명과 생명이 놓인 환경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

 

무책임하게 반려동물을 학대하거나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건 물론이거니와 반려동물만 위하고 고통 받는 다른 동물은 애써 외면하는 오늘, 우리는 인간 이외의 생명과 함께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사고는 개념을 형성하고 그 개념은 다시금 사고를 강화한다. 비록 우리가 개념을 떠나 사고할 수 없다지만, 그렇기에 더욱 대상의 본질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그 대상이 생명일 때는 더더욱 말이다. 개와 고양이는 반려동물이기 이전에 우리 배에 기항했던 바닷새와 같은 동물이며, 동물이기 이전에 우리처럼 소중한 생명임을 우리는 서서히 잊고 살아간다.

 

남미에서 왜 이런 상념에 빠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거리에 수많은 개와 고양이가 자생하게 된 배경, 그런 녀석들을 대하는 그곳 사람들의 시선, 이로 인해 초래된 각종 문제들. 이들 하나하나는 페루와 칠레의 오랜 역사가 만들어낸 고유의 결과물이며 앞으로 이들이 짊어지고 해결해 가야할 색이자 짐일 거다. 하지만 노인과 개의 마주침이 아직까지 내게 진한 여운을 남기는 건 왜일까. 나는 개와 고양이를 어떤 속박된 개념이 아닌 생명으로 바라보는 남미인의 시선을 안고 뉴질랜드를 향한 17일의 항해를 시작했다.

 

 

 

 

발파라이소 언덕을 가득 메운 오색찬란한 슬레이트 판잣집들은 따스한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 아롱다롱한 색을 마구 발산한다. 또 골목과 모퉁이 사이사이에 저마다의보물을 숨기고 있다.

칠레 발파라이소의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쿨쿨 자고 있는 개. 카메라 셔터 소리에 슬며시 눈을 뜨더니 다시 잠든다. 늘어진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나도 잠이 밀려온다.

쿨~쿨~쿨~ 이번에는 세 녀석이다. 신선한 물이 담긴 물통이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큰 개들이 거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내겐 낯설기만 하다. 위험한 동물이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홀짝홀짝 소방용 호스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는 고양이. 잠시 후 물을 기르러 온 아저씨는 멀찍이서 고양이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줬다.

아저씨가 자기에게 다가온 개를 쓰다듬더니 진드기를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주신다. 위생적으로 분명 좋지 못한 모습이 왜 나를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아저씨처럼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싫었다.

서로를 그윽히 바라보는 개와 고양이. 웃기게도 고양이는 하반신 마네킹 위에 올라가 있다. 개의 시선은 마치 고양이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는 듯하다.

칠레의 대표적 부촌인 비냐 델 마르 해변의 한 공사장이다. 개 두 마리가 잠시 공사가 멈춘 틈을 타 해변을 마구 누비고 있다. 녀석들,틀림없이 수영에 자신 있어서 저러겠지?

남미에서 노숙인과 개는 거리에서 함께 자고 먹고 행동했다. 사람도 동물도 거리에 내몰린 채 아픔 속에 살아간다. 다른 생명을 올바르게 마주하지 못할 때 결국 우리는 스스로도 위할 수 없지 않을까.

슬금슬금, 고양이를 한 번 만져보기 위해 다가가는 소녀의 몸동작이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다! 고양이 녀석도 분명 소녀의 접근을 알고 있을 텐데,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성화를 바라보는 고양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동물이 함부로 다뤄지는 세상을 바꿔달라'고 하느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 이 고양이 좀 보세요! 작은 생명을 향한 순진무구한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끝까지 지키고 위해야 할 소중한 보물이다.

새끼 강아지는 반려견일까, 아니면 길 위에서 태어난 개일까? 아무렴 어떠랴. 저 두 소녀처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이 가장 소중한걸. 이를 구분 짓는 내가 우습기만 하다.

해변에서 잡아온 물고기를 즉석에서 손질하는 아주머니 곁으로 개와 고양이가 몰려든다. 아주머니가 남은 생선 찌꺼기, 혹은 이따금씩 큼직한 덩어리를 던져줬는데 녀석들은 아주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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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수의사 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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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괭인 2013.04.11 1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도 글이지만 사진에서 연중님의 시선이 느껴져 참 좋습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따스하고 상냥한 느낌입니다. 남미의 햇살이 그러했나요? ^^
    도시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서, 가끔은 동물들의 삶을 인간이, 인간의 삶을 도시가 결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어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함께 나란히, 사람과 동물 모두가 저마다의 행복과 건강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수의사 연중 2013.04.11 20: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미의 햇살도 따스하지만,

      이곳 동물도 상냥하게 저를 대해 준 것도 있겠죠 ^^

      공감가는 말씀이세요.

      동물은 우리가 만들어 낸 세상에 들어와

      소외된 삶을 살고 있지요...

      공존의 길을 우리가 어서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유기동물 책임입양해요 2013.04.15 1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다큐 한 편 본 것처럼 따스한 사랑이 느껴져요. 물론 연중님께선 안타까이 보이신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옛시절 모습과 다를바 없거나 아님 우리의 옛시절 보단 나은 모습으로 비춰지는 건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져서 일까요? 그들의 사랑과 연중 님의 사랑도 멈추지 않길 바래봅니다

  3. 2014.03.08 0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소피스트 지니 2014.10.02 1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5. 2015.03.06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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