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람찬 일상

교사와 절대악

교사와 절대악


어젯밤 새벽 불현듯 십 년 전 고등학생 때 기억이 떠올랐다. 모교는 소위 스파르타 교육으로 지역에서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자연스레 체벌은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훈육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모교는 독특한 훈육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교무실에 들어갈 때 군대에서처럼 거수경례와 함께 용무를 밝혀야만 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 3학년 11반 김 연중, 교무실에 용무있어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처럼 말이다.


수능을 코 앞에 두고 한 화학교사가 학생부장에 새로 취임했다. 여느 학생부장이 그러듯 그는 학생들에게 자기만의 통치방식, 그 중 유독 교사에 대한 존경을 강요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교무실은 물론 교내 모든 곳에서 거수경례를 요구했다. 당시 학생들 대부분은 이를 그저 도제식 교육의 틀 안에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던 나는 학생부장이 한 학생을 세워놓고 체벌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마도 그 놈의 인사가 문제인 듯 했다. 나는 으레 인사를 할 상황이 아니라 생각하며 그들 곁을 지나갔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거수경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내게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구둣발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정확히 두 번.


당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사실 나보다 더 놀란 건 친구들이었다. 교실에 들어선 날 본 친구들은 아연실색하며 내게 거울을 보라고 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구두약으로 처참히 어그러져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내게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그냥 말 없이 책상에 앉았다. 당시 내게는 목전에 닥친 수능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수능 점수를 1점이라도 올릴 수 있다면 그에게 몇번이고 머리를 내밀었을지 모른다.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게 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길은 오직 소위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없어 보였다. 그런 내게 그의 폭력은 권위로, 나의 굴종은 순종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그에게 교사란 직업, 그리고 학생부장이라는 직책은 그의 내면의 절대악이 실현되기에 가장 안성맞춤이지 않았을까. 그에게 학생들의 성공에 대한 뒤틀린 환상과 폭력에 대한 굴종은 그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열등감을 표출하기에 가장 쉬운 대상이었던 것 같다.


졸업 후 한 동안은 그 때 일을 잊고 살았다. 체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끔 떠오르긴 했지만 이내 잊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때의 기억은 사그러지기는커녕 점점 자주 그리고 강렬하게 나를 엄습하고 있다. 때로는 다른 안 좋은 기억까지 끄집어내 그 세력을 확장한다. 수십 만원 하는 유도복을 구입할 수 없어 방과 후 수업을 옮기려는 우리를 하키 채로 마구 후려쳤던 중학교 체육교사의 증오, 어렸을 때 다리를 찢어놔야 유연성이 길러진다며 여학생들이 자신의 성기 코 앞까지 머리를 숙이도록 했던 또 다른 체육교사의 변태적 웃음은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개인사를 묵묵히 들어주었던 은사님과의 기억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에게 주입했던 사고는 결국 우리의 미래보다는 그들 당장의 편의와 안락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학창시절 동안 받은 수 많은 체벌의 대부분은 기억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아마도 체벌의 이유가 충분히 납득할 만 했으며, 그 방식이 내 존엄성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체벌은 나뿐만 아니라 교사의 권위 또한 세운다. 하지만 당시 나는 대학입시 경쟁에 시달린 탓에 본인의 존엄성이 짓밟힌 것조차 모르고 내달리고 있었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한 채 이룬 성공은 결국 자신을 악마에게 판 것과 다름이 없다. 아니, 그 악마는 존엄성을 앗아가는 대신 타인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 학생부장에게 짓밟혀진 순간 나는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짓밟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존엄성은 교육수준이나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성공보다는 결국 나 아닌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 받을 때에야 비로소 누릴 수 있으며 때로는 이를 지키기 위해 저항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십 년 전에 알았다면 그의 구둣발이 남긴 상처가 이렇게까지 흉지지는 않았을 텐데.


비단 교사뿐일까. 조금이라도 휘두룰 수 있는 권력을 지닌 모든 직업이 그렇지 않을까. 절대악은 그 실현되는 방식과 규모가 조금씩 다를 뿐 이 순간에도 당신과 나의 존엄성을 은연중에 짓밟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