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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

개를 먹는다는 것

미야옹~! 수의사 연중입니다.

 

 

 

대한민국은 개를 먹는 몇 안 되는 대표적 국가다. (담즙채취를 위한 곰 사육을 용인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반대와 찬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나름의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상대를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평행선만 달리고 있다. 바로 생명에 관한 가치, 그리고 밥그릇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 돼지, 닭과 같은 동물 모두 개와 똑같이 소중한 생명이거늘,

왜 유독 개만 먹는 걸 반대하나요? 참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어요!”

 

모두가 맞는 말이다. 이는 단지 반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개를 먹는 걸 조금이라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의견이다. 나 또한 개를 먹지 말자고 주위를 설득할 때 스스로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가끔씩 들었던 게 사실이다. , 염소, , 돼지, , , 사슴, , 고래, 고양이 등, 모두 동물은 우리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같은 종 내에서, 혹은 다른 종과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소중한 생명이다. 갓 태어난 송아지와 어미 소의 생이별을 본 적 있는가. 송아지의 울부짖음과 어미 소의 눈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슬픔엔 거짓이 없다.

 

종차별이란 말 그대로 종에 따른 차별을 의미한다. 이는 인종차별, 성차별, 종교차별 등과 같이 인간 내 존재하는 뿌리 깊은 차별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인간과 다른 존재인 [동물]이라는 관념은 종차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듯하지만, 우리 인간은 인간 내에서의 다양한 차별에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해 왔다. 노예제라는 미명 하에 족쇄를 채웠으며,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60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또한 여성의 참정권이 생긴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이처럼 인간 내에서의 차별과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종차별 사이의 간극은 그리 넓지 않다.

 

종차별은 인간과 동물 사이뿐만 아니라, 동물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우리는 인간 이외의 동물을 산업동물, 실험동물, 반려동물, 유해동물, 멸종위기동물 등 수많은 단위로 구분한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모든 동물 하나하나가 동등한 기본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동물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지켜야 할지, 죽여야 할지 등을 결정한다. 어느새 인간은 지구에서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구, 즉 반려동물이기 때문에 개를 먹어선 안 된다는 주장은 더 이상 내게 설득력이 없다. 누가 감히 우리에게 개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말할 권리를 주었는가. 물론 개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동반자였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만으로 반려동물이라는 구분 속에 개를 포함시켜 다른 동물과 달리 특별히 보호받을 권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개를 먹지 말자고 주장할 때 우리가 만든 이 [구분]지어진 세계의 본질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언행이 정당성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모든 동물을 먹어도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그리고 개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조금이라도 더욱 호소력을 지니기 위해선 먼저 우리 인간과 육식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곧 개를 넘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한 번 더 고민하게 만든다.

 

기원전 1만 년부터 기원전 7,000년까지 인간은 온순하고 통제 가능한 동물을 조금씩 삶에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곧 수렵·채집에서 농경·목축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때부터 동물은 단순한 먹이에서 재화의 가치를 지니기 시작했다. 수렵·채집과 농경·목축, 이 두 사회는 채식과 육식의 개념을 공유한다. 이처럼 인간의 역사는 육식과 떼어놓을 수 없는 잡식동물의 길을 걸어왔는데, 이러한 육식의 필연성은 수렵에서 목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가축]이라는 관념을 탄생시켰다.

 

[가축]이라는 말도 위에서 언급한 구분의 덫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그나마 작위적이지는 않다. 산업동물과 가축 모두 재화의 가치를 지닌 동물을 의미하지만, 내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산업동물에서 동물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닌 공장형축산업의 소모재로 존재할 뿐이다.

 

그 과정이야 어찌됐든 육식의 필연성으로 인한 일부 동물의 가축화는 인간의 파괴성에 큰 억제력을 행사해 왔다. 이는 대한민국과 같이 산업화가 진전된 국가에서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한데, 바로 육식의 필연성보다는 단지 심미적 목적만을 위해 동물이 도살되는 경향이 이러한 곳에서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축]의 관념은 바로 우리가 지켜야할 윤리적 한계를 설정한다. 나는 그 한계선에 위치한 동물이 개, , 고래, 고양이 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를 먹는 걸 찬성하는 사람들은 흔히 심미적 목적 이외에 고유문화를 들먹이곤 하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보릿고개 시절 함께하던 가치는 오늘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소위 정력에 좋다는 지극히 비과학적 기호로 변질된 지 오래다.

 

이러한 윤리적 한계선은 일단 무너지면 다시 그 억제력을 되찾기 굉장히 어렵다. 인간의 파괴성은 어디까지 그 영역을 확장할지 알 수 없다. 이미 인간은 동물의 가축화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재화의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결국 [가축]의 관념은 윤리적 한계선인 동시에 생명의 상업적 이용을 용인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 중심을 굳게 지키지 않으면 세상 모든 동물이 인간의 헛된 욕구에 희생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 윤리적 한계선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우리 사회에 모든 동물을 생명 그 자체로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면, [가축]의 관념이 만드는 한계선은 더욱 도드라져 개를 먹는 사람들은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사고는 비단 개에 한정되지 않고 자연스레 담즙을 위한 곰 사육, 녹용·사슴피를 위한 사슴 사육 등으로 확대될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너무나 이상적이라 무척 험난할 것이며,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계속해서 곰곰이 고민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외면이 종차별이 자행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가축에서 산업동물로 전락한 동물의 기본권도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개에게 양고기가 들어간 소위 프리미엄 사료를 먹이고 있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도살되는 새끼 양을 생각하진 못한다. 이러한 자각 없이 반려동물과 함께함은 결국 스스로 종차별을 행하는 것과 다름없다. 무지와 외면 또한 큰 죄악이 아니던가. 비록 육식의 필연성으로 가축화가 이뤄졌지만, 오늘날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생명 그 자체로 전혀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공장형축산업에서 육식의 필연성은 도리어 동물의 기본권 침해를 정당화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동물은 단순한 기계처럼 생각도, 감각도 없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결국 인간은 개, 고래, 고양이 등을 먹으면서 그 윤리적 한계선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가축의 기본권을 유린하며 도덕적 토대까지 침식하고 있다.

 

복날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너 보신탕 먹니?’라 묻곤 하는데, 이 질문은 개라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동시에 종차별의 모순이 담겨 있다. 따라서 개를 먹지 말자는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선 개가 다른 동물과 달리 우리 인간에게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모든 동물이 똑같이 소중한 생명임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모든 동물을 먹어도 되는 것일까?’ 결국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왜 개만 먹지 말라고 하느냐?’고 물을 때, 나는 우리가 진실로 육식을 필요로 하는 잡식동물이라면, 그 필연성으로 인해 희생되는 동물의 기본권을 최대한 존중하는 동시에 그 윤리적 한계를 명확히 설정해야 하며, 그곳에 개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영국을 위시한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어떤 동물을 먹어도 되냐의 문제를 넘어, 이제는 동물을 어떻게 사육하고 도살해야하는지 깊은 고민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동물을 향한 전체주의 시각에서 개체주의 시각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즉 과거에는 어떤 종 단위, 혹은 개체수를 중심으로 기본권이 논의되었으나, 이제는 한 마리 한 마리 각 개체의 탄생과 죽음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모든 동물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못한 채, 아직도 개라는 의도치 않은 종차별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우리가 동물의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을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그러한 존재일수록, 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우리의 자의적인 판단이 모든 동물의 기본권을 침해할 권리를 정당화하진 못한다. 결국 그들도 우리도 덧없지만, 소중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