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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

개와 우리 사이. 개를 먹는다는 것

 

 

 

배는 어느덧 일본해협을 지나 태평양에 접어들었다. 해협 양 옆으로 펼쳐진 섬들은 정말이지 끝없이 이어졌는데, 나는 함미 갑판에서 이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일본이 크긴 큰 나라구나라며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섬들도 자연스레 모습을 감췄지만 바다 새 몇 마리는 여전히 주위를 빙빙 돌며 우리가 아직 대양에 들어서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이제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는 꼬13일을 가야한다. 진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해협까지 다시 이틀이 걸렸는데, 앞으로 13일을 더 가야 한다니.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준비해 온 책을 모두 읽고도 남을 시간일 수도, 아니면 두어 권의 책을 읽기에도 턱없이 부족할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잠시 이번 여정을 시작하기 얼마 전에 블로그에 올린 어떤 글을 되짚어 보려 한다. 아니, 시인하는 글이라고나 해야 할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 큰 오류를 범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를 깨달은 것은 출항 얼마 전이었다. 아니, 어쩌면 글을 공개한 직후였을지도 모르겠다(직감에 따르면). ‘고쳐야지, 고쳐야지하는 생각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들었지만, 그 글 자체가 어떤 주제를 바라보는 나의 당시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고친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분명 존재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그 글에는 손대지 않고 오늘 글로 대신하려 한다.

 

문제의 글은 바로 개를 먹는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짧은 칼럼이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종차별은 인간과 동물 사이뿐만 아니라, 동물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우리는 인간 이외의 동물을 산업동물, 실험동물, 반려동물, 위해동물, 멸종위기동물 등 수많은 단위로 구분한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모든 동물 하나하나가 동등한 기본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동물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지켜야 할지, 죽여야 할지 등을 결정한다. 어느새 인간은 지구에서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구, 즉 반려동물이기 때문에 개를 먹어선 안 된다는 주장은 더 이상 내게 설득력이 없다. 누가 감히 우리에게 개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말할 권리를 주었는가. 물론 개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동반자였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만으로 반려동물이라는 구분 속에 개를 포함시켜 다른 동물과 달리 특별히 보호받을 권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개를 먹지 말자고 주장할 때 우리가 만든 이 [구분]지어진 세계의 본질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듯 나는 종차별은 결국 모든 종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사이에서의 차별,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의 차별뿐만 아니라 동물과 동물 사이에서의 차별은 결국 하나의 종차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작위적인 기준으로 동물을 구분하고 이 구분지어진 범주를 바탕으로 동물을 향한 우리 태도를 결정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인간 아닌 동물에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함은 자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의 기준이 예전부터 공존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정해졌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인위적이며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태평양 일주를 시작하며 한 가지 품은 기대가 있다면 바로 바다에서 돌고래를 만나는 것이다. 선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실제로 돌고래 무리가 큰 배를 따라와 함께 나아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잠수함을 찾아내기 위한 음탐시험을 할 때면 어느새 배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 수 Km를 함께 일주하곤 하는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갑자기 웬 고래 이야기를 했을까? 바로 오늘날 우리는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함께하기 상대적으로 편한 개, 고양이 등 이외의 살아있는 동물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히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오늘 식탁에 오른 고기, 즉 동물이 어떻게 길러졌고 죽임을 당했는지조차 모르지 않은가(안다고? 당신이 아는 건 거대축산업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우유 포장지에 그려진 평화로운 초원은 오늘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소, 돼지와 같은 동물과 함께 살아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의사로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느끼는 건 이들도 소위 반려동물이라는 개, 고양이와 다름없이 풍부한 감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위의 고래 이야기도 선원에게 전해 들어 간접적으로 느낄 뿐이지 내가 돌고래의 풍부한 감성을 느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결국 개가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이는 다른 이들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개와 가까이서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단지 다른 동물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고 그들이 풍부한 감성이 없는 동물이라곤 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와 정서적 교감을 못하는 상황을 사냥하거나, 먹어도 된다는 근거로 이용하는 것은 당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인간답지 못한 행동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내 생각은 처음 개를 먹는다는 것글을 쓸 때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다음에 있다.

 

  [가축]이라는 말도 위에서 언급한 구분의 덫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그나마 작위적이지는 않다. 산업동물과 가축 모두 재화의 가치를 지닌 동물을 의미하지만, 내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산업동물에서 동물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닌 공장형사육의 소모재로 존재할 뿐이다.

 

  그 과정이야 어찌됐든 육식의 필연성으로 인한 일부 동물의 가축화는 인간의 파괴성에 큰 억제력을 행사해 왔다. 이는 대한민국과 같이 산업화가 진전된 국가에서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한데, 바로 육식의 필연성보다는 단지 심미적 목적만을 위해 동물이 도살되는 경향이 이러한 곳에서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축]의 관념은 바로 우리가 지켜야할 윤리적 한계를 설정한다. 나는 그 한계선에 위치한 동물이 개, , 고래, 고양이 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를 먹는 걸 찬성하는 사람들은 흔히 심미적 목적 이외에 고유문화를 들먹이곤 하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보릿고개 시절 함께하던 가치는 오늘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소위 정력에 좋다는 지극히 비과학적 기호로 변질된 지 오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먼저 개를 먹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정한 후 그 이유를 찾았던 게 아닌가 싶다. 정반대로 사고가 이어져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육식의 필연성으로 인해 가축이란 범주가 형성되었고 바로 이를 통해 인간의 윤리적 한계를 정할 수 있다는 논리는 그나마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가축의 범주 바로 밖에 개, , 고래, 고양이를 위치시키다니! 이처럼 작위적인 기준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글의 도입부에서 이러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기준이 동물과 동물 사이에서의 종차별을 초래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임을 지적하면서 후반부에선 이를 내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만 것이다.

 

처음 개를 먹는다는 것을 소개했을 때 반응은 다소 뜨거웠다. 평소 개를 먹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은 감사하게도(지금은 민망하게도) 글을 이곳저곳에 날라주었다. 하지만 이 분들 중 일부(정말 일부) 또한 어쩌면 나처럼 개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이미 마음에 정해놓고 이를 지지하는 글의 등장에 비판 없이 환영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사실 든다. 이러한 사고는 논리적으로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초래한 논리적 오류를 시인하고 나니 속이 한결 후련하다. 나는 다른 어떤 논리를 피기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사실 개를 먹지 말아야 할 논리적 이유는 글로 표현할 만큼 내 마음에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개를 먹는다는 것의 오류를 인정한 후부터 더욱 조심스러워졌을지도). 처음부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개를 먹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정해 놓지 않고 무에서 시작해 어떤 논리적 귀결에 이르는지 말이다. 내가 즐겨하는 말 중에 가치판단엔 해답이 없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지만 논쟁을 피해가는 데도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오늘도 이 말로 몸을 숨겨보려 한다.

 

어쩌면 개는 먹고 말고의 대상이 아닐지도. 이렇게 오랜 세월 논쟁거리가 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건 아닐까(희망사항). 에라, 모르겠다, 정말. 내일이면 항해 7일째, 그저 빨리 돌고래와 조우하길 바랄 뿐이다.

 

2012/08/14 - [동물복지] - 개를 먹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