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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

홀로코스트 = 도축장? 지독한 종차별주의 - 피터싱어의 [동물해방]을 읽고

미야옹 수의사 연중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10~12명의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십명의 낯선 사람들과 낯선 장소에 갇혀있다. 모두가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이곳은 도대체 어딜까. 모두들 웅성웅성, 어떤 이들은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되었다며 외치고, 또 어떤 이들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떤 상황도 판단할 힘이 없다. 그저 멍하니 그들이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 잠시 후, 그들이 들어오더니 우리를 하나씩 데리고 간다. 평소에 우리를 관리하던 그들과는 다른 복장이다. 이윽고 내 차례. 문이 열렸다. 그들은 쇠기둥으로 이어진 가느다란 통로로 나를 밀어넣었다. 앞으로 갈 수 밖에. 언제나처럼. 

 통로의 끝에도 역시나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손에는 짧고 단단해 보이는 채찍이 들려있다. 내게 직면한 미래가 자유가 아님을 직감한 순간, "타당~!" 순식간에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서 있을 수가 없다. 땅에 쓰러진 나에게 그들이 다가온다. 그는 내 머리 속에 이번엔 길고 가느다란 채찍을 쑤셔 넣었고, 어느새 나는 거꾸로 매달려 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위 이야기는 바로 도축장에 끌려간 소의 마지막 순간을 의인화하여 묘사한 것이다. 나는 약 6년 전에 처음 도축현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관계자는 도축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비슷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도축과정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HACCP(위해요소 중점관리)인증이었다.(대한민국에서 가축의 도축은 HACCP인증을 받은 도축장에서만 가능하다.) 

 소의 도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도축장에 도착한 소는 일단 계류장에서 일정 시간을 머문다. 이윽고 소 한마리 한마리가 맨 오른쪽에 위치한 문을 통해 내몰리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지체없이 소의 머리를 향해 타격총을 쏜다. 충격을 받은 소가 쓰러지자마자 그는 긴 막대기를 타격총에 의해 뚫린 두개골을 통해 연수까지 집어 넣어 완전히 생명을 끊는다. 죽은 소는 크레인에 거꾸로 들어올려져 좌측으로 이동된다. 좌측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구역별로 대기하고 있으며 좌로 천천히 이동하는 소를 각 부위별로 능수능란하게 해체한다. 한 마리의 소가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소고기가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놀라운 점은 인류 역사에서 소의 마지막 순간과 비슷한 사례를 매우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유사한 것은 아마도 나치의 유대인학살이 아닐까 싶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유대인말살을 목적으로 포로수용소에서 조직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그 참혹함을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이 학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10~12명의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유대인들)"과 함께 지내다 때가 되면 연령대 별로 분리되며, 더 이상 노역을 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가스실에 내몰린다. "수십명의 다른 사람들, 비슷한 또래(=쓸모없는 유대인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좁고 어두운 곳에서 학살된다.

 


 내가 소의 마지막 순간을 의인화하여 묘사한 이유는 바로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같은 "종차별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인종차별, 성차별과도 일맥상통한다. 혹자는 분명 도대체 무슨 미친소리냐며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차별이 동물의 그것과 같다니! 하지만 나를 비난할 당신의 그 근거는 어디서 오는가. 불과 수십년 전만해도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 현재 우리가 동물에게 자행하고 있는 행위를 똑같이 하고 있었다. 노예제도 아래에서 흑인은 단지 피부가 검다는 이유 하나로 철저히 '동물'로 여겨졌다. 이슬람권에선 아직까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개선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인종차별, 성차별의 흔적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목도할 수 있다. 나를 비난하기 전에 인종차별, 성차별과 같은 인간의 평등의 논의대상에서 동물이 왜 배제되야 하는지 먼저 생각해 달라. '흑인이니까' '여자니까'의 사고방식은 '동물이니까'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본 포스팅은 도축시스템을 고발한다거나, 채식을 권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철학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 또는 세계관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과 동물에 대한 철학은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오늘날 우리의 동물에 대한 태도의 토대를 제공한다. 철학은 시대가 근본으로 삼고 있는 가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야 하기 때문에 과거의 철학이 만들어낸 우리의 종차별주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보다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지독한 육식주의자였으며 아직까지도 완전히 육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위의 견학 이후에 군복무 동안 군납 축산물의 생산관리감독을 위해 도축,도계,육가공장을 쉴 새 없이 드나들었으며 이때까지도 도축,도계는 인류를 위한 매우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며, 위생적인 시스템으로 생각해왔다. 오직 나는 규정에 맞는 고기가 생산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피터싱어의 [동물해방], 잔 카제즈의 [동물에 대한 예의],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 등을 읽으며 생각은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모든 경험은 새롭게 해석되고, 오늘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를 두고 망설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왜 [동물해방]이 청소년, 혹은 대학 필독도서로 지정되지 않는지 불만이다. 인간이라면(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지구상에서 도덕적 가치와 의식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우리와 다른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함이 당연한데 신기하게도 이는 현실 속에서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육식주의자, 채식주의자, 축산인, 기업인, 정치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토론한다면 동물은 물론이고 인류는 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싱어는 누구인가?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1946년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주 멜버른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철학자로서 그가 평생 관심을 갖는 것은 실천철학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응용철학이라고도 불린다. 그동안 그는 민주주의와 불복종, 안락사, 낙태, 시험관 아기 등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윤리적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다. 동물에 관한 관심사도 그러한 그의 철학 태도에서 나온 매우 현실적인 철학문제이자 윤리문제이다.

 그는 <동물해방>을 비롯하여 <민주주의와 불복종>, <실천윤리학>, <범위확장>, <마르크스>, <헤겔>, <동물공장>, <재생산혁명>, <아기가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삶과 죽음에 대한 회상>, <세계화의 윤리>,<선과 악의 대통령> 등이 있다.

 그는 동물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현실적 운동으로 연결시킨 사람으로 호주 동물권익 옹호단체인 동물해방의 초대 회장과 호주와 뉴질랜드 동물협회연맹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현재 프린스턴 대학의 인간가치연구센터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진출처 : http://www.prabhupadanugas.eu/?p=9632 , http://ibloga.blogspot.com/ , http://histclo.com/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