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께 익숙한 이곳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날은 저녁이라 더욱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지요.

 

 

5월 13일은 제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2012년 이날의 기억은 온통 생일과는 무관한 어떤 장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신논현역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터벅터벅 -약속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사람구경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중 강남역 (구) 6번 출구 앞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워낙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라 으레 주점판촉 -그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줄지어 있더군요- 이나 기업마케팅 행사가 있나 싶었지만 그곳에 관심을 빼앗긴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바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어느 할머니께서 새끼고양이 다섯 마리를 '팔고' 계셨던 것이죠. 사람들 대부분은 멀리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지켜보거나 바삐 어딘가를 향해 스쳐 지나갔지만, 3~5명의 사람들은 마치 400m 릴레이를 하듯 바뀌며 옹기종기 그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스쳐가는, 모여있는 사람들 얼굴에서 다섯 새끼고양이와 할머니를 향한 '무관심, 호기심, 연민, 사랑, 분노' 등 무수히 많은 감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분명 옳지 못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지류가 한데 뒤섞여 흘러가는 세찬 물살에 도저히 뛰어들 자신이 없었지요. 그렇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저는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현장을 <바라보는>' 대신에 '현장을 <방관하고>'라 표현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러기엔 당시 제 감정의 흐름이 너무나 복잡했지요. 방관만 하고 있었더라면 그 무관심은 제 마음을 잠식해 단순히 위 감정들 중 어떤 한 상태만을 유지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후술하겠지만 이 또한 저의 자기기만 일수도-

 

타인의 감정에 대하여 논함은 결국 본인 감정의 바탕 위에 일어나기 때문에 어쩌면 그 일은 결국 타인이 아닌 본인 감정의 이해와 표현일 수 있겠죠. 그러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본인 감정으로 인한 타인 감정의 왜곡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은 어쩌면 가장 객관적인 표현이 될 수 있겠단 생각도 해 봅니다. 세상일의 대부분은 객관이 아닌 주관에 의한 직관으로 흘러가니까요. 따라서 저도 오늘 글에서 당시 제가 느낀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보려 하니다. 이 글은 제 글이니까요.

 

다섯 새끼고양이와 할머니가 만들어 낸 다양한 감정은 고양이를 넘어 우리가간 이외의 존재를 생각할 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연 육식을 필요로 하는가 / 그렇다면 공장식축산업의 현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 모든 동물이 소중한 생명이라면 소와 돼지는 먹으면서 왜 개는 안된다고 할까 / 만약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반려동물을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저 소중한 생명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렇기에 그들을 구해줘야 하나, 아니면 장기적으로 이러한 판매행태를 없애기 위해 꾹 참아야 하나' 등 동물 복지와 관련된 고민의 호수에 발만 지긋이 담궈도 '무관심, 호기심, 연민, 사랑, 분노' 와 같은 감정들은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칩니다.

 

 

뭉크의 절규- the Scream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한걸음 깊이 생각해 보면 복잡한 감정이 요동칩니다.

<사진 출처 : http://www.tabwallpaper.com/munch-the-scream>

 

 

다섯 마리의 연약한 생명이 길바닥에서 소위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자는 어느 남루한 할머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현장을 스쳐 지나갑니다. 아마도 이 무관심은 주변에서 이러한 모습이 더 이상 우리를 자극하지 못할 정도로 흔하며,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이런 바닥에서 동물을 '구입'해 길러 본 경험이 한번쯤 있었기에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무관심이 아닌 '사랑' 등 다른 종류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익숙함으로 인한 이러한 무관심은 결국 인간 이외의 존재를 향한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 인구는 70억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아온 누적인구는 약 1,000억 명으로 추산되고 있지요. 가히 놀라운 숫자가 아닙니까? 하지만 더욱 소름끼치는 점은 일주일에 인간이 먹어치우는 동물의 수가 20억 마리에 이른다는 것과 인간이라는 한 종으로 인해 매년 1,000여 종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는 겁니다. 즉, 그동안 지구상에 살아왔던 모든 인간의 수만큼 동물이 한 달 주기로 계속해서 죽어나가며, 지구 역사상 6번째 대멸종이라 불릴 만큼 급격한 종의 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1초에 3,500 마리의 동물이 죽임을 당하고 있어

살아있는 동안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혹자는 제게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70억 명의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육식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 세상엔 굶어죽는 사람도 아직 많은데 인간보다 동물을 우선시하자는 것인가!?" 처럼 말이지요. 물론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도 이해가 갑니다. 오늘날 육식은 어떻게든 인간에게 필연적인 요소 -생명영위를 위한 육식을 떠나 오랜 세월 형성되어 온 사회문화적 요소를 모두 함께 고려했을 때,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 '필연'적인 요소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가 되어 버렸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굶어죽는 안타까운 사람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공장형축산업을 정당화 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되는 동시에 그 논리의 가장 취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왜? 공장형축산업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여러 현실들은 사실 이 산업 스스로 자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를 시민들로부터 철저히 감추기에 온 힘을 다하지요.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래성 위에 새워진 공장형축산업을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하고 오히려 동조하기까지 하니까요. 공장형축산업으로 인한 '육식의 과다 -일정 소득 이상의 사람들 중 "나는 딱 필요한 만큼의 육식을 하고 있다"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소비', '음식 -고기 뿐 아니라 모든 먹거리- 의 불균형 분배' 등은 우리의 건강 뿐만 아니라 지구의 건강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장형축산업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육식의 종말>, <동물해방>, <동물에 대한 예의>, <잡식동물의 딜레마> 등의 책을 권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본 글의 논지를 이어가겠습니다.

 

 

가축화가 정말 동물과 인간 사이의 거래로 이뤄졌다면, 동물은 오늘날이 오리라 생각했을까요?

<사진 출처 : http://www.prabhupadanugas.eu/?p=9632 >

 

 

공장형축산업을 향한 비판은 동물 기본권이 전혀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육식에 필연적인 존재더라, 가축화된 동물을 먹기 위한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물의 가축화 과정을 추정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생의 언약 : 동물은 왜 사육되겠다고 선택했는가>의 저자 스티븐 부디안스키는 가축화가 인류가 마을 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에 소, 돼지, 닭과 같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 이뤄진 일종의 거래라 합니다. 즉, 이들 동물은 인간의 보호를 통해 야생으로부터 존속을 보장받는 대가로 고기와 우유, 달걀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이지죠.

 

이 약간은 억지스러워 보이는 추정은 결과만 보았을 때 상당히 인간과 가축 모두가 원하던 이익을 아주 훌륭히 충족시킨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소, 돼지, 닭은 인간 다음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수의 포유동물로 자리잡았으며, 인간은 이들로부터 넘치도록 음식을 얻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혹자는 부디안스키의 논리와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과 같은 저명학 사회생물학자를 앞세워 "이들 가축은 그들 몸을 내어주는 대신 목표달성에 성공했다. 따라서 결코 거래에 대한 후회는 없을 것이다."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의 잘못된 이해의 산물일 뿐입니다. 바로 '생명체는 누구나 유전과 환경의 공동 작업에 의해 형성되는 독특한 존재'임을 간과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도킨스와 윌슨도 항상 강조하던 점입니다. 유전적으로 번성했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환경에서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생명체의 존엄 자체가 위협받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아무리 유전적 흐름에 따라 필연적으로 가축이 되기로 암묵적 합의를 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는 과정자체를 무조건 정당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거래 초기에 그들이 생각할 때 계약은 무척 합리적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공장형축산업이 도래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인간에게서 최소한의 윤리의식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오늘날 가축에게 대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재계약은 없을 겁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들은 가축이 되기를 다시 선택했을까

 

 

이처럼 가축의 짧은 생 -보통 기본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축 당하기에- 에서 합당한 기본권을 보장해 줌은 정당한 거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가축화의 역사를 차근차근 따라가면 그들도 우리와 다름없는 소중한 생명임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장형축산업의 높게 드리워진 담을 조금만 넘어 들여다봐도 오늘날 우리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실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외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태도는 가축을 넘어 반려동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지요.

 

흔히 반려동물이라 함은 인간과 한 공간에서 가족처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개, 고양이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 -햄스터, 토끼, 거북, 이구아나, 페릿 등- 을 뜻합니다. 개는 오랜 세월 인간과의 동거를 통해 그 생활양식에 큰 변화를 거쳐 왔으며, 고양이는 아직 그 과도기에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물론 이러한 생활양식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저는 '애완동물'을 몹시 싫어합니다. 애완(愛玩)의 한자어에서 '사랑'이라는 뜻도 굳이 끄집어 낼 수 있겠지만, '완(玩 : 희롱할 완)'에서 애완용품의 느낌이 너무나 강하게 느껴지지요. 우리가 내뱉는 의식적인 행동이 무의식을 강화하고, 그 무의식이 의식적인 행동을 다시금 강화함을 생각해 봤을 때 '애완'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의식이 동물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게끔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로

 

 

대신에 저는 '반려동물'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혹자가 "'반려'는 반려자처럼 사람에게나 붙이는 말이다."라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비판은 동물을 책임지지 못할 자신을 반증할 뿐이지요. 하긴, 어쩌면 '가축, 애완동물, 반려동물, 야생동물' 등과 같은 단어 자체가 인간이 이 지구상의 동물을 임의적으로 분리하고 차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이들 동물 모두를 수단보다 목적으로 대할 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옳은 방향으로 의식을 강화하는 언어 사용을 장려해야 합니다.

 

자, 다시 강남역 (구) 6번 출구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다섯 새끼고양이와 할머니를 공장형축산업의 현실을 외면하던 그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와중, 어랏!? 한 젊은 여성이 한 새끼고양이를 들더니 할머니에게 만원 몇 장을 건냈습니다. 이윽고 종종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으로 사라집니다. "그 여성은 도대체 어떤 마음에서 그 새끼고양이를 데려갔을까" 분명 악한 마음은 없었을 겁니다. 새끼고양이가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그리고 보호해주고 싶은 '호기심과 연민'이 가득했겠지요. 하지만 그 여성의 마음이 단지 그 뿐이었다면 아무리 선의라도 그 순간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곳에서 반려도울을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입양'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올바른 '입양'은 오랜 시간에 걸친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되는데, 이는 반려동물과 입양자 모두의 행복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가능케 합니다. 그 준비란 마음의 준비 뿐 아니라 반려동물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의 조사, 그들이 뭘 먹는지, 어떨 때 수의사에게 데려가야 하는지 등의 공부, 그리고 반려동물과 함께하기 위한 입양자 생활의 변화 등 모든 부분이 포함되지요. 바로 사람 아이를 입양할 때에 준하는 신중함이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강남역 (구) 6번 출구와 같은 곳에서는 '호기심과 연민'의 감정 뿐 결코 입양이라 부를 만한 요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호기심과 연민'이 나쁜 감정이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감정이 '책임감'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사고 파는 사람 모두에게서 "싸게 샀어요, 비싸게 팔았어요"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호기심과 연민'이 반려동물을 향한 '책임감'을 대신할 수는 없어

 

 

'구입'된 반려동물이 태어난 위생상태가 형편없는 대량 사육환경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파보바이러스, 홍역바이러스와 같은 각종 전염성질환 -뿐만 아니라 '구입'되는 반려동물의 대부분은 어미를 떠나기에 너무 어린 경우가 많습니다-  에 취약함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많은 아이들은 '구입' 당시엔 활동적으로 보이지만 집에 오면 곧 아프기 시작합니다. 바로 계속된 스트레스가 가정에서 정점을 찍어 잠시 숨어있던 감염성질환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몹시 당황합니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반려동물을 '입양'한 보호자들도 아이들이 아파하면 당황하는데, 아무런 준비없이 '호기심과 연민'이라는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반려동물을 '구입'한 사람들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아이가 치료받는 과정 동안 회복여부를 떠나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고 불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 대상은 반려동물을 판매한 업자들, 수의사, 어쩌면 반려동물에게까지 이어지지요. 이후에도 충분한 준비없이 반려동물을 '구입'한 가정은 '입양'한 가정에 비해 반려동물의 건강과 행동을 비롯한 전반적 이해에서 부족함을 보여 함께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자주 호소하게 됩니다. 

 

 

반려동물이 '구입'되어 가정에 왔다면 그만큼 함께함에 어려움이 다가와

 

 

물론 일부 책임감있는 사람들이 비록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반려동물을 '구입' 했더라도 '입양'한 사람들 못지 않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바로 반려동물을 향한 '호기심과 연민'이 '사랑'을 기반으로 한 '책임감'과 결합한 경우라 할 수 있겠지요. 이들은 비록 충분한 사전 준비가 없었지만 이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반려동물의 기본권을 충족시켜 줍니다. 결국 반려동물이 가정에 들어오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사람들 개개인의 성향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구입' 과정을 통해 이러한 '책임감'을 기대하기 힘들다는데 있습니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웬만한 '책임감'이 있지 않고는 급작스러운 반려동물의 '구입'을 '입양'처럼 변화시켜가는데 큰 어려움을 느낍니다.

 

 

당신이 바라는 반려동물과의 행복한 삶은 노력없이 절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사진 출처 : http://veterinarynews.dvm360.com/dvm/article/articleDetail.jsp?id=751792&pageID=2>

 

 

여기서 잠시 우리는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로 저명한 정신과 의사 M. 스캇 펙은 '사랑의 경험은 인간 한계의 확장을 가져오므로 그 경험은 역시 자아 경계와 연관돼 있다. 인간의 한계가 인간의 자아 경계다. 사랑을 통해 한계를 확장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을 돕기를 소망하면서 그 대상을 향해 다가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을 느껴야 한다.'고 서술합니다. 그는 이어서 '일반적으로 사물과 비교해서 생각할 때 실질적인 성숙이 가능한 존재는 인간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 이외의 존재를 바라보는 마음은 '사랑'이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사랑을 통해 인간의 자아 경계를 확장함은 우리가 인간 이외의 생명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통해 충분히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장형축산업에서 고통받으며 죽어나가는 가축들, 책임감없는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리는 반려동물에 대한 태도 변화는 동물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이룰 수 있으며, 결국 우리 인간 자아 경계의 확장을 가져올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곧 '책임감'과 연결되지요.

 

 

동물을 향한 사랑은 우리 자아 경계 확장과 연결되

 

 

여러분께 고합니다. 동물의 기본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장소에서 반려동물을 데려 가려는 순간, 당신의 행위는 '구입' 입니까, 아니면 '입양'입니까. 혹시 당신의 '호기심과 연민'을 '사랑'과 혼동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당신이 정말 반려동물을 '사랑'하고 '책임감'으로 무장했다면 다섯 새끼고양이와 할머니의 모습에 으레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사람 입양이 함부로 이뤄지는 경우 우리가 분노하듯 반려동물의 기본권이 붕괴되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 '사랑'의 감정을 가진 사람은 함께 분노했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이 '적합하지 못한 처우'인지 모르는데 너무한 말 아니냐고 억울해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한 무지 또한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무지는 때로는 '자기기만'의 용이한 변명수단이기도 하지요. 당신은 혹시 '호기심과 연민'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져 한 생명을 단돈 몇 만원에 '구입'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쉽게 데려간 반려동물의 기본권을 지켜주지 못했을 때 연약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혼도 함께 상처받고 병들어 갑니다. 인간 이외의 존재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직면해야할 상황에서 외면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무지 또한 사랑이 부족한데서 나와, 사랑은 그만큼 이해와 실천이 필요한 것 

 

 

강남역 (구) 6번 출구 현장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모두가 행복한 주말을 만끽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강남역 (구) 6번 출구에 혼자 쪼그려 앉아 다섯 새끼고양이를 판매하고 계시던 할머니이시죠. 그 할머니는 비난받아 마땅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연약한 다섯 새끼고양이를 판매하는 할머니를 비난할 권리가 없습니다. 할머니께서 그 날 그 장소에 계셨던 건 바로 우리 모두 때문입니다. 신중하지 못한 반려동물 '구입'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온 우리 모두가 공범입니다. 그 할머니는 필경 이 글을 일고 계신 그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살고 계실 겁니다. 반려동물을 가벼운 마음에 '구입'하는 우리의 그릇된 수요는 계속해서 생활고를 겪고 계신 분께 그릇된 일을 하시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쪽 진영에서 비난받아 마땅할 사람을 굳이 찾는다면 할머니께 동물을 공급한 업자겠지요.

 

동물이 아프고 상처 받으면 결국 인간도 아프고 상처 받습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사진 출처 : http://aluminatinglives.blogspot.kr/2010/07/why-how-can-you-get-involved.html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이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 여성과 함께 떠난 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새끼고양이들이죠. 만약 그 장소의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과 연민'의 감정을 다시금 곰곰히 생각해 '구입'의 마음을 접었다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날 지구상에는 20억 마리에 이르는 동물이 일주일만에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 돼지, 닭과 같은 가축 뿐 아니라 반려동물도 함께 포함됩니다. 그 새끼고양이들이 이후 팔리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면 어느 일주일의 20억 마리 중 4마리를 차지하겠지요. 이러한 대량학살은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소중한 네 생명을 무시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리가 없음이 명백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는 우리가 자초했기에 우리가 풀어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공범

 

 

육식을 조금씩 줄여 공장형축산업의 변화를 유도하고 반려동물을 가볍게 '구입'하지 않고 유기동물보호소나 가정을 통해 '입양'하는 문화를 정착시킨다면 이 20억 마리를 15억, 10억으로 차츰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과정은 비록 쉽지 않겠지만 동물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계속해서 지구상에 만물의 영장으로 남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작은 시작이 큰 변화를 만듭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수의사 연중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단비 2012.07.05 2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생각이 드네요 저도 꽤 자주가는곳이고 여러번봤죠 어쩔땐 멍멍이 어쩔땐 양이.. ㅠㅠ ....

    • 수의사 연중 2012.07.06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그날 하루만이 아니었군요.. 강아지까지..

      이러한 판매행태와 식용개 모두 인식개선을 통해 소비를 줄이는게 가장 큰 억제력이 아닐까 합니다.. ^^

  2. 고양이엄마 2012.07.16 1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양이와 함께 살아나가고 있고. 동물권에도 관심이 많으며 그것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고,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일에 정말 분노하면서도.. 육식을 끊을 수 없다는 딜레마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육식을 줄이는 것부터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책감이 들어요 ㅜ ㅜ

  3. 무궁화 2012.08.15 0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집에 들어온 냥이들을 보고 딸아이 친구가 엄마를 졸라서 냥이 한마리를 데려왔더군요..
    그래서 예방접종도 해야하고 또 중성화도 해야한다고..그리고 평균 수명이 15년정도 한다고 하니
    못키운다고 버린다고 해서 한마디 한 일이 있네요... 냥이들 들일때 딸아이 한테 집에오면
    무지개 다리 건널때까지 울가족이라고... 잠깐 놀다가 실증나서 버리는 장난감이 아니라고 ..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어릴땐 이쁘고 귀엽다고 키우다가 크면 징그럽다고 버리는 사람도 보았어요....
    생명으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참 안타깝네요..

  4. 이윤나 2012.08.29 09: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연민이 남아요....그냥 볼수도없고 다데려와 키울수도 없으니깐요.반려동물에대한 생각을 다시정리할수있게 글을써주셔서 감사합니다.판매와 구매가 아닌 입양을 해야되는게 가장 근본적인 해결이라는 말씀. 이 의식이 많이 전파되고 바꿔졌으면 좋겠어요^^

  5. 무릉선사 2013.01.14 1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자가 최대의 객관성 위에서 애완동물을 통해서 동물의 기본권까지 주장한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개관성이란 도덕성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덕성 마저 기준이 없고 주관적이라면 동물에 대한 객관적 사고란 원인무효입니다.
    사람은 동물에게 사랑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로부터 위안을 받는 존재입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집이나 구입하려는 사람을 관찰하면 쉽게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동물 기본권에 대한 배려는 고양이가 쥐를 생각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 수의사 연중 2013.01.15 1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물 기본권에 대한 배려가 고양이가 쥐를 생각해 주는 것과 같다라.
      저는 고양이가 쥐를 대하는 행동은 살아 남기 위한, 즉 본능 그 자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과연 그러한 본능 그 자체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인간이 먹이사슬 제일 꼭대기 위에 있다고 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를 함부로 할 수 있다는 정당화의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인간이기에, 즉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사유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인간 이외의 존재를 대할 때 본능 이외의 가치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도덕성은 기준이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우리 존재 이외를 이야기하는, 또한 가치 판단의 문제기 때문에 어떤 정답을 찾을 순 없다고 봅니다. 공론화하고 이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 속에 우리 사회에 맞는 최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동물 기본권을 생각한다는 건 동물에게 사랑을 나눠줘야 한다는 말이 아닌, 그들을 그 존재 자체로 합당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글 읽고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