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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2012년 4월)

동물과 함께한 영국여행 (2부 : Borrowdale Valley in Lake District)

수의사 연중

 

동물과 함께한 영국여행

 

2부 : Borrowdale Valley in Lake District

 

 

사진 1. 평온해 보이는 양 가족.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닙니다.

 

 

 2012년 04월 17일. Windermere를 떠나 Lake District 북부의 작은 마을 Keswick으로 향했습니다. 어느 아름다운 유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호수와 산악지형으로 이뤄진 Lake District에서 Keswick은 Windermere와 함께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거쳐가는 마을 중 하나입니다. Lake District에는 호수, 산악지형 이외에 빼 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양(Sheep)입니다. 필자는 런던, 버밍햄, 멘체스터를 거쳐 이곳까지 왔지만, 모두가 영국의 대표적인 산업도시인지라 전혀 양을 볼 수 없었지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개발된 방직기로 20세기 초반까지 전세계 양모산업을 주름잡던 영국은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사진 2. 아직 젖을 때지 않은 새끼양 두 마리를 돌보는 어미양

 

 

 하지만 Windermere에서 이곳 Keswick까지. 마을과 마을 사이 호수와 산 이외의 자연은 온통 양들이 풀을 뜯는 광활한 초지로 가득해, 마치 제가 양의 나라에 여행 온 이방인 같았습니다. 영국 특유의 낮지만 웅장함을 간직한 산, 그리고 작지만 여느 강이나 바다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수로 둘러싸인 초지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들을 보고 있노라면 '너희는 정말 한 생명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살아가는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은 소, 돼지, 닭과 같은 다른 가축에 비해 어느 정도 기본권이 보장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양을 떠올리지 그들의 철저히 제한된 기본권은 좀처럼 생각하기 힘들겁니다. 저 또한 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던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인간 이외의 생명을 그 자체로 '진실된 존중'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들의 삶 속에 숨겨진 이면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을 통해 생명의 기본권을 판단할 때, 결국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기준 안에서 쉽게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함정은 반려동물, 가축, 동물원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속에도 항상 도사리고 있지요.

 

 

사진 3. Keswick에서 Seatoller까지 함께한 Stagecoach 78

 

 

 Keswick은 Derwent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호수는 비록 Windermere 호수보다 그 규모는 작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규모와는 상관없음을 제게 알려준 곳이지요. (Derwent 호수에서의 꿈 같았던 아침은 '3부 - Derwent Water in Lake District'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Windermere에서 버스로 30분 가량 달려 Keswick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예약해 두었던 B&B(Bed & Breakfast 의 약자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침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곳이지요.)에 짐을 풀고 바로 오늘의 목적지 Borrowdale Valley로 출발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Scafell Pike의 북쪽 지역 물이 모여 흘러 내리는 Borrowdale Valley는 거대한 빙하에 깍여 형성된 'U' 자형 지형입니다. 그 형상이 마치 날카로운 턱과 같아 'Jaws of Borrowdale'이라 불리기도 하지요. 사실 이곳을 여행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은 'Lonely Planet : Britain'에 나온 단 한장의 사진, 그것이 전부였지요. 이번 여행기에서는 Borrowdale Valley를 오르며 만난 양들과의 소중한 경험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사진 3. National Trust에서 관리 중인 Seatoller

 

 

  Keswick 버스정류장에서 78번 Stagecoach를 타고 20~30분 가량 달리면 Seatoller라는 곳이 나옵니다. 바로 이곳이 Borrowdale Valley 트레킹의 시작점이지요. 버스에서 만난 Newcastle에서 온 노부부는 '이층으로 올라가 주변 풍경을 마음껏 느껴 보게나. 이곳의 모든 버스정류장이 Lake District 여행의 출발점일세'라며 저를 더욱 우수에 잠기게 하셨습니다.

 

 

사진 4. 길에서 만난 이 아이도 저처럼 길을 잃었을까 걱정하고 있었겠지요.

 

 

 

  Seatoller 정류장 주위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들 뿐, 길잡이의 지표로 삼을만한 Borrowdale Valley의 웅장한 기운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양을 관리할 시간이 아닌지 길을 물어볼 사람도 전혀 없었지요. '그래! 이게 혼자하는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어!?' 무작정 한 길을 택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드넓은 초지를 반으로 뚝 자른 듯한 길을 따라 20분 가량 걸었을까. 저처럼 길 잃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울타리 밖으로 나와 방황하고 있는 한 마리 양이었지요. 달리는 자동차, 맹수, 사냥꾼 등 위협요소가 없었기에 '곧 양치기가 나타나 울타리에 넣어주겠지..' 저는 유유히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진 5. 스쳐 지나가는 저를 바라고고 있는 양.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진 6. 이윽고 Borrowdale Valley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20분 가량을 더 걷자, 저 멀리 하얀 눈으로 뒤덮힌 산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작정 접어든 길이 바로 Borrowdale Valley로 향하는 방향이었던 것이죠. 한시라도 빨리 계곡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도 앞섰으나, 주위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뭘 그리 서두르냐'는 듯 재촉하는 발걸음에 한층 여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진 7 8. Borrowdale Valley로 향하는 길은 양들이 가득한 초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양모산업을 주름잡던 영국은 호수, 뉴질랜드와 같이 광활한 초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나라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오늘날 영국에서 양모산업이 양 산업으로부터 창출되는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95% 수입은 어디서 창출되는 것일까요? 바로 Lamb, 즉 새끼양고기가 이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양은 소, 돼지와 같은 가축과 달리 계절발정을 하는 동물입니다. 해가 길어지는 봄, 초여름에 발정이 시작되는 고양이(장일발정동물)와 달리 해가 짧아지는 가을, 초겨울에 발정이 시작되지요. 이러한 동물을 단일발정동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미양은 보통 가을, 초겨울에 임신하여 약 5개월 후인 봄, 초여름에 출산을 하지요. 

 

 

사진 9. 태어난 새끼양은 어미양과 초지에서 함께 지내게 됩니다.

 

 

  위 사진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열심히 어미양 젖을 빨고 있는 새끼양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새끼양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구나. 이런 아늑한 환경에서 살아가며 양털을 일년에 한 번씩 제공한다면 그들의 기본권이 어느 정도 존중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라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가 어미양이 새끼양을 보살피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때가 출산이 주로 일어나는 봄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양의 95%는 Lamb, 즉 어린 양고기로 팔려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곧 이 어린 생명들은 어미에게서 떼어져 인간의 식탁 위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생후 12~20개월의 이얼링머턴(yearling mutton)

생후 1년 미만의 새끼양고기(Lamb)

생후 5~6개월짜리는 스프링램(spring lamb)

생후 6~10주의 베이비램(baby lamb)

 

 

 새끼양의 삶은 태어나기 전부터 위와 같이 인간이 정한 기준에 따라 언제 죽을지 미리 결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어미소에게서 떼어져 고개를 돌릴 틈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송아지고기(Veal)로 생을 마감하는 송아지에 비해서는 그 기본권이 보장되는 삶이지만, 우리가 겉으로만 보고 그들의 삶을 판단할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사진 10. 다리 건너편에서 조심스레 저를 살피고 있는 양 두 마리

 

 

사진 11. 가까이 접근해도 사람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양들을 살피며 계속 걷다보니 어느 새 이들 초지를 관리하는 목장이 나왔습니다. 이곳에는 따로 울타리 없이 자유롭게 배회하는 양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목장 주변에 있는 양들은 주로 교배나 출산, 혹은 양털을 깍기 위해 한곳으로 모아진 아이들입니다. 울타리도 없이 이렇게 가까이서 양들을 볼 수 있다니 아무리 제 직업이 수의사라도 흔치 않은 기회였지요. 그래도 너무 접근하면 놀랄 수 있으니 일정 거리를 두고 살펴보았습니다.

 

 양모산업은 그 역사가 매우 깊어 산업혁명 이전부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기간산업이었죠. 따라서 수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인위적 교배가 빈번히 일어났고, 결국 점차 양털은 털갈이 없이 일년 내내 두텁게 유지되도록 변해왔지요. 이같은 변화는 애초 의도대로 수익증대의 효과는 가져왔지만, 양에게는 결코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비자연적으로 두터워진 털로 인해 여름철 열상사(heat-stroke)가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하였죠. 양모산업 관계자들은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에 양털을 깍아 열상사 방지와 수익창출을 모두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초래한 일인데 마치 '자비'를 베푸는 양 말이죠.

 

 두터워진 털은 열상사 이외에도 또 하나의 큰 문제를 초래하였습니다. 털이 수북하게 자라면서 분변, 땅과의 접촉이 잦아  회음주 주변이 파리가 알을 낳기에 최적의 장소로 변하고 만 것이죠. 태어난 구데기는 그 안에서 살아있는 양의 피부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역시 자연상태의 양에게 이러한 파리로부터의 공격(Fly-Strike)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털은 그리 수북하지 않았으며, 주기적인 털갈이로 인해 파리가 알을 까기 쉽지 않았을 뿐더러,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었지요.   

 

 

 

사진 12 13. 파리가 알을 까는걸 방지하기 위해 Mulesing 이라는 처참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www.animalsaustralia.org/media/>

 

 

 아마도 위 사진을 본 독자는 대부분 '이게 도대체 무슨 사진인가..' 하실 테지요. 이는 오늘날 양의 기본권이 박탈되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입니다. 바로 파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회음부에서 뒷다리까지 털이 나는 피부를 아예 벗겨버리는 Mulesing 이라는 행위입니다. John WH Mules라는 사람은 개량 품종의 양에게서 자꾸 파리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자, 주요 발생 부위인 회음부 주변의 피부를 벗겨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파리가 알을 까는 경우가 현저히 줄어들지 몹니까. 이런 우연찮은 발견은 이 사람의 이름인 Mules를 따 Mulesing 이라는 양모산업의 필수 과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제 1의 양모산업 국가로 들어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아직까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지요.

 

 Mulesing은 주로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시행됩니다. 양모산업 관계자들은 어린 시기애 Mulesing을 해야 오히려 그 고통이 덜 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포경수술을 출생 직후에 해야 덜 고통스럽다는 논리와 비슷하지요. 하지만 자연상태의 양에게 이러한 Mulesing은 전혀 필요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인위적인 교배로 인해 열상사, 파리와 같은 문제의 올바른 해결방안은 자연상태의 그들을 그 자체로 '존중'함에 있음이 자명함에도, 인간은 끝까지 수익증대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오히려 Mulesing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방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진 14. 양 목장에서 발견한 소들. 마치 한우와 매우 흡사하게 생겼습니다.

 

 

사진 15. 소들이 거니는 환경은 양들에 비해 매우 열악했습니다.

 

 

 양 목장에서는 소 열댓 마리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양과 달리 질퍽질퍽한 진흙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지요. 드넓은 초지에서 풀을 뜯는 양과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이곳의 소는 우리 한우와 매우 닮았습니다. 저를 쳐다보는 애처로운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이들도 분명 풀을 뜯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사진 16. 양 목장 맞은편에 위치한 Borrowdale Valley의 시작을 알리는 문

 

 목장을 지나자 드디어 Borrowdale Valley로 향하는 관문이 나왔습니다. 본격적인 Borrowdale Valley가 시작되는 곳이지요. 걸쇠를 뽑아 문을 열며 한 걸음 나아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사진 17 18 19 20. Borrowdale Valley. 빙하가 쓸고 지나간 그 가운데를 걸어 올라갔습니다.

 

 

  넓은 폭의 U자형 지형이 좁다란 V자형 지형으로 변해감에 따라 이전과 같은 정형화된 초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계곡을 더 깊이 깍아내려는 듯 정상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습니다. 자연의 색, 규모, 냄새, 온도 등에서 풍겨오던 목가적 분위기는 산을 오를수록 어느새 웅잠함으로 변해가고 있었지요.

 

 사진에 반해 무작정 찾아온 Borrowdale Valley지만, 사실 이곳의 고도, 날씨, 산행 예정시간 등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저 멀리 보이는 눈 덮힌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 뿐,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요. 만약 하산하기 전에 어두워져 길을 놓친다면, Lake District의 야생 맹수를 만난다면, 무사히 하산을 했지만 Keswick으로 돌아가는 막차를 놓친다면. 이 모든 예상되는 상황은 여행의 묘미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다이나믹했지요.

 

 한 30분 쯤 걸었을까. 저 멀리서 한 멋진 청년이 그레이트 댄 두 마리와 함께 내려옵니다. 넌지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나요?' 하고 묻자, 살인미소와 함께 '원하는대로 가세요. 당신의 몫입니다.'라 답하며 스쳐 지나갑니다. 흠... '당신의 몫'이라. 마치 '아무 걱정 말고 이곳에 당신의 몸과 마음을 맡기세요. 그 다음은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멋진 개 두마리와 함께 유유히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제 발걸음도 자연스레 가벼워졌지요.

 

 

동영상 1. Borrowdale Valley 중턱

 

사진 21. Borrowdale Valley 중턱. 빙하가 쓸고 지나간 U자형 지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위 동영상과 사진을 보시면 거대 빙하가 쓸고 지나가 형성된 U자형 지형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가운데 흘러가는 계곡물 주위에 형성된 가파른 경사의 자연초지는 하부로 내려갈수록 완만해져 드넓은 평야초지로 변모합니다. 바로 이곳까지 오면서 봐왔던 양들이 거닐던 곳이지요. 저 계곡물을 따라 걷다 위 사진을 찍은 위치까지 올랐을 때 저는 U자형 계곡은 이제 끝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산을 넘어가면 또 하나의 빙하지형이 펼쳐집니다. 그야말로 자연의 신비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진 22 23 24. 가파른 산에 오르자 양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랏! 힘겹게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는데 누군가 저를 쳐다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얼굴의 양 한 마리가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게 아닙니까. 양은 목장을 떠난 이후 볼 수 없었는데, 이 경사진 산자락에서 만나다니 참 신기하지 않나요? 양치기가 이 양들을 산자락에 데려놓았을까요? 아니면 도망쳐 나왔거나 원래 이곳에서 사는 아이들일까요? 그 내막을 함께 살펴보도록 할께요!

 

 

 

 

사진 25 26. 산악지형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Upland Sheep

 

 

 양은 그 종이 굉장히 다양한 동물입니다. 영국에서만 70종 이상이 알려져 있지요. 모든 동물이 저마다 살아가기 적합한 고유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양은 종마다 특정 환경에 뚜렷히 적응해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고지대, 저지대, 추운 곳, 더운 곳 등 그 환경에 따라 자신만의 생존법을 오랜 세월 터득해 왔지요. 예를 들어, 평야지대에 비해 먹이가 풍족하지 못한 산악지형에서 살아가는 양은 보통 새끼를 한 마리만 낳습니다. 보통 두 마리를 출산하는 평야지대의 양에 비해 양육을 위한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 중에서도 이곳 Lake District는 양의 다양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고지대, 저지대 양의 종들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요. 하지만 이 다양성은 양 산업의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고지대 양들은 험난한 지형에 사는만큼 매우 강인했는데, 목축업자들은 이러한 고지대 양의 좋은 특성을 저지대 양에게 전달해 주고 싶었죠. 결국 이들 사이의 교배를 통해 얻은 잡종이 순종에 비해 더욱 두터운 털을 가지며, 빠르게 살찐다는 걸 발견했고, 이 사육법은 영국 양 사육의 필수단계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러한 개량이 계속됨에 따라 잡종이 점차 모든 초지를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호수나 뉴질랜드와 같은 거대 양 산업국가에서는 Merino라는 획일화된 종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도 이를 깨닫고 무분별한 교배 대신 순환식 교배를 통해 종 보전에 뒤늦게나마 힘쓰고 있습니다.

 

 

 

 

 

사진 27 28 29. 이런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인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험난한 산악지형에 살아가는 고지대 양들은 사실 철저한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 아이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암양의 발정이 시작되는 가을이 되면 산 밑으로 내려가 저지대 양과 교배를 하고 다시 고지대로 올라옵니다. 보통 한 마리가 발정계절 동안 20~40마리의 암양과 교배를 한다고 하네요. 이처럼 고지대에 살아가는 양들은 새끼양을 잃을 염려도, 양털을 강제로 깍일 염려도 없이 대자연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자유는 결국 저지대 양들로부터 두터운 털과 고기를 얻기 위함이라 생각하니 한켠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결국 열상사와 파리로부터의 공격을 감수하더라도 양털 생산량을 늘리고, Lamb, 즉 새끼양이 출하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살을 찌워보자는 이유이기 때문이지요.

 

 

동영상 2. Borrowdale Valley 중턱에 위치한 호수

사진 30. Borrowdale Valley 중턱. 큼직한 호수가 산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양들을 보며 다양한 생각에 잠겼지만, 산을 오르는데 제게 큰 힘을 준 건 사실이었습니다. 중간중간 힘들 때마다 불쑥 나타나 마치 제게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 힘내렴!'이라고 말하는 듯 했지요. 산 중턱을 넘자 큼직한 호수를 간직한 완만한 산악지형이 나타났습니다. 위 사진에서 호수 11시 방향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시나요? 저 협곡이 제가 올라온 길입니다. 제법 올라왔지요!?

 

 

동영상 3. 이때의 감정은 아직까지 좀저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진 31. 필자는 딱 이곳에서 다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이제 처음 산행을 시작할 때 저 멀리 보이던 눈 덮힌 정상이 마치 손에 닿을 듯한 고도까지 올라왔습니다. 바람은 처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세차게 몰아쳤습니다. 위 동영상과 사진을 찍다가 제가 바람에 날라갈까봐 겁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이곳에는 고지대 양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고지대 양이 아무리 강인해도 이런 곳에선 살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영국의 산은 고도는 대한민국의 산보다 그리 높지 않은데, 조금만 올라도 날씨가 다양하게 급변합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와중에 비, 눈, 심지어 우박까지 만났으니까요. 눈 덮힌 정상에 가득한 안개는 저곳의 날씨도 분명 범상치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빨리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곳까지 3~4시간이 걸려 올라왔는데, Keswick으로 돌아가는 막차 시간까지 2시간 남짓 남았기 때문이지요. 양들을 보며 여유있게 올라온 걸 고려하더라도, 지금 내려가야 막차를 탈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조금 더 계획성있게 산행 계획을 짰다면 아쉬움이 적었겠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간직한 채 하산하였습니다. 내려가는 와중에 다시 만난 양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사진 32. Seatoller 정류장의 이정표. B 5289 국도는 Lake District 여행에서 동맥과도 같은 도로입니다.

 

 

사진 33. 'Dogs Welcome' 제가 개가 된 마냥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사진 34 35. 무슨 생선 요리였는데.. 너무나 맛있어 미친듯이 먹었습니다... !

 

 

무사히 Keswick으로 향하는 막차를 탈 수 있었고 7시 즈음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물어 마을에서 가장 맛있다는 레스토랑으로 향했습니다. 산행하는 동안엔 배고픔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숙소에 도착하니 너무 허기지더군요. 레스토랑 입구에서 반가운 문구를 보았습니다. 'Dogs Welcome, 개를 환영합니다.' 음식점, 심지어 고급 레스토랑엔 반려동물의 출입이 당연히 안될거란 우리의 편견을 허망하게 무너뜨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그날엔 개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지만, 저런 문구가 있다는 자체에서 영국인의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식사는 무슨.. 생선 요리를 먹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요리였는데,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혹시나 아는 분은 말씀해 주세요! 후딱 해치우고 마트에서 맥주를 사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사진 36 37. Lake District에서의 마지막 밤 긴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 준 아늑한 숙소입니다.

 

 Keswick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저무네요. 이번 여행기는 어떠셨나요? 저는 Borrowdale Valley 산행도 물론 좋았지만, 영국의 양 목장을 가까이서 살펴본 시간도 너무나 기억에 남습니다. 혹시 사진만 보고 '양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신 분 계신가요? 어쩌면 본 여행기에 실린 사진 속 새끼양들은 이미 어느 누군가의 뱃속에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둔부의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 속에 있을지도. 여름이 시작됨에 따라 다 큰 양들은 한 마리 한 마리씩 줄을 지어 털이 깍이고 있을지도. 순서가 늦은 양은 열상사와 파리 구데기로부터 고통받고 있을지도. 고지대 숫양은 어서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며 세찬 바람을 맞으며 풀을 뜯고 있을테며, 저지대 암양은 출산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가을에 있을 교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겉으로 봤을 때 평화롭고 아늑한, 아름다운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색안경을 끼고 우리 기준에 맞춰 동물의 삶을 평가하고 진실된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반려동물, 가축, 동물원 동물에 대한 왜곡된 사고는 우리 사회에 계속 존재할 것이며. 언젠간 그러한 편견이 진실로 받아지는 날이 올 겁니다.

 

다음 3부 (Derwent Water in Lake District)에서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지닌 Derwent 호수와 그 주변에서 본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 하려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