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물복지

태평양에서 전하는 반려동물을 향한 단상

 

 

 

항해 11일째. 우리 배는 예정된 항로에서 발달 중인 불안정한 저기압 대를 피해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항해나 작전 관련 병과가 아닌 나로선 이러한 정보를 귀동냥으로 알 수밖에 없는데, 오늘은 우연찮게 기상현황판의 위성사진을 보고 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위성사진에서 우리 배의 위치뿐만 아니라 한 가지 흥미로운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미드웨이Midway. 미드웨이 해전이 일어났던 그 곳을 지나가다니, 기분이 묘했다.

 

오늘은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글로 옮겨보려 한다. 인간과 개, 고양이를 비롯한 반려동물이 어떠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특히 극도로 도시화된 환경에서의),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지 논의해 보려 한다. 이는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지극히 예민한 주제인데, 그럴수록 수면 위로 끄집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제를 바로 직면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근원적 두려움 혹은 무관심은 실제 개개인의 마음속 깊은 곳 갈등의 증거가 아닐까.

 

먼저 나와 함께하고 있는 반려동물을 소개함이 순서일 듯하다. 그들을 만나게 된 경위, 그들과 함께하면서 내가 초래한, 겪고 있는 무책임한 행동과 어려움을 솔직히 고백해야 이번 글로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며 정직하고 옳은 비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눈으로 다른 반려동물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개개인의 소소한 경험이 곧 어떤 대상을 향한 관념을 형성한다. 그들은 곧 이 글의 시작인 동시에 끝이다.

 

나에겐 2살 남짓 된 고양이 소중, 이제 겨우 6개월을 넘어가고 있는 개 반달이가 있다. 소중은 2011년 겨울, 포항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근무지 내() 일명 사고팔기 게시판에선 하루에도 수십 건씩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곳엔 바깥 사회와 으레 마찬가지로 가끔씩 개나 고양이도 상품으로 등록되곤 했는데, 부분 입양한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이었다. 아마도 이동이 잦은 직업 특수성이 초래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소중이도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소중이 거래글을 보자 문득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다. 바로 수의대 생활 내내 수도 없이 들어온 말.

 

   ‘고양이와 함께하지 못한 수의사는 고양이를 다루는 데 서툴 수밖에 없어. 고양이 집사는 이를 대번에 알아채지. 네가 고양이를 이해하려면 꼭 함께 살아봐야 해. 의학책만 들춰봐서는 분명 한계가 있으니. 고양이는 바로 그런 존재야.’

 

왜 그 동안 다른 고양이 거래 글을 보았을 때 위와 같은 충동이 들지 않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니, 충동뿐 아니라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때는 그저 더 이상 늦기 전에 고양이를 키워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다짜고짜 나는 글을 올린 사람에게 연락해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곧 그에게서 사진이 도착했다. 샴 블루 포인트Siamese Blue Points였다.

 

 

 

 

샴 고양이Siamese Cats와는 조금 다른 아이였다. 얼굴과 사지, 꼬리의 무늬는 다소 짙은 회색빛을 띄었고, 눈은 푸른색. 온몸에서 귀티가 흘렀다. 다소 새침한듯하면서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런 아이였다. 만약 길고양이나 내 눈에 볼품없는 품종의 고양이였다면 당시 마음을 어떻게 먹었을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그 당시 나는 생명을 두고 품종이나 따지던 사람에 불과했으니. 바로 그 주에 나는 소중이가 있는 포항으로 향했다. 앞뒤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봐야만 하는 수의사였고, 더욱이 그 고양이는 그 어떤 녀석보다도 멋졌다. 바로 구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돈 30만원에 나는 소중이란 한 생명을 덥석 버렸다.

 

녀석과 함께한 시간은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소중과 함께함에 있어 수의장교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했는데, 그 덕에 우리는 항상 붙어 지낼 수 있었다(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사실 잠시나마 항상 함께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건물은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에 근무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고작해야 4명뿐이었고 건물 주위엔 차나 사람의 왕래가 무척 적었다. 우거진 산림 속에 턱하니 방치된 2층짜리 도시건물이랄까, 도시나 시골이라고 표현하기엔 뭔가 애매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고양이가 살아가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사무실은 2층에 위치했는데, 처음에 나는 소중이가 밖으로 나가는 걸 철저히 통제했다. 항상 문과 창을 닫은 채 생활했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어떤 전염병에 감염될 가능성보다는 혹여나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이는 순전히 고양이를 이해하지 못한 내 무지에 불과했다. 고양이 삶에서 자유가 가지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중이의 주된 하루 일과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것. 이외엔 대소변을 보거나 밥 먹는 일뿐이었다. 간간히 보이는 움직임이나 애교는 그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의 간접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회의에 다녀온 나는 기겁했다. 복도에 면한 출입문 위 창문이 산산조각 나 있는 게 아닌가. 소중인 언제나처럼 창틀에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슬며시 내게 다가와 몸을 비볐다. 아무리 생각해도 창문이 깨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둑이 들 곳도 아니었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저 작은 창문으로 침입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없어진 물건도 없었다. 문득 출입문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소중이가 자주 올라가던 곳이다. ‘설마 저 곳에서?’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소중이가 야옹~’하고 울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의 전후에 생긴 변화는 오로지 깨진 창문뿐이었다. 소중이 몸엔 상처 하나 없었다. 그가 범인이라면 유리 조각으로 인해 가벼운 상처라도 있을 법 한데 말이다! 그저 해프닝이라 넘기고 단념할 수밖에. 다른 사람들도 거 참 묘하네요.’하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려는 순간, 소중이가 책장 위에 올라섰다.

 

온 몸이 소름끼쳤다. 냉큼 책장 위로 올라간 그는 스멀스멀 주위를 살피더니 출입문 위 창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책장에서 창문까지 자신이 과연 뛸 수 있을지 없을지 거리를 재는 게 아닌가. 그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마치 100m 출발을 기다리는 육상선수처럼 뒷다리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래, 바로 녀석이 범인이었던 것이다.

 

창틀엔 유리조각이 아직 군데군데 박혀 있었기에, 그리고 실제 소중이가 그 거리를 뛸 수 있겠다는 생각에(녀석은 창문에 부딪힌 후 땅으로 떨어졌던 것. 유리 조각은 사무실 밖, 그러니까 복도 쪽에 흩어져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창문이 깨진 증거였다) 나는 얼른 그를 저지했다.

 

왜 그런 위험천만한 행동을 했을까? 답은 뻔했다. 소중인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어떡하면 저 드넓은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순간, 내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반려동물이 내게 지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반려, Companion이란 의미는 말 그대로 함께함을 의미했다. 우리가 자신의 편의와 기쁨을 위해서만 개나 고양이와 함께하려 한다면 그들은 반려동물이 아닌 [애완동물, Pet]과 다름없는 존재에 불과할 터였다. 생명은 결코 애완용품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반려동물과 산업동물을 명확히 구분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반려동물은 흔히 개와 고양이를 비롯한 동물을 지칭하는데, 여기엔 보통 우리와 함께 생활하기 상대적으로 용이한 작은 동물이 속한다고 나는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려동물이 작을뿐더러 인간에게 친근하고 온순한동물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인간에게 친근하고 온순한동물은 소위 산업동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돼지, , 염소 모두 인간에게 친근하고 온순한동물이다. 단지 그들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를 뿐이다. 오랜 전엔 반려동물과 산업동물의 구분이 오늘날처럼 뚜렷하지 않았는데,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축산업과 사료산업을 축으로 하는)는 둘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 간극은 오늘날 굉장히 모순된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는데, 이는 너무도 비극적이라 우리는 애써 무관심으로 외면하고 있다. 바로 먹어도 되는 동물과, 먹지 말아야 할 동물이 철저히 구분지어진 현실 말이다. 이는 결국 동물 중에 반려동물은 우리가 함부로 대해선 안 되며 그들의 고통과 기쁨은 함께 나눠야한다는 해괴망측한 개념을 만들어 냈다. 동물 중 반려동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내가 책임진 동물인데 말이다.

 

다시 소중이이야기로 돌아오자. 결국 나는 녀석을 소유하고픈 욕구 때문에 그를 위한답시고 철창 안에 가둬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하는 우려는 사실 도망가면 어쩌나’, ‘다른 삶을 포기하더라도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해하는 욕심의 변명에 불과했다. 나는 그를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그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양보하기로 마음먹고 그 동안 굳게 닫혔던 창문과 출입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결국 소중이 입장에선 목숨을 걸고 창문을 깨부순 끝에 고양이로서의 자유를 쟁취한 거였다.

 

바깥세상으로의 출입을 허용한 그날부터 하루하루 조바심이 났던 게 사실이다. 그가 문 밖을 나설 때면 언제나 꽁무니를 쫒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믿음을 얻었다(아니, 그가 주었다고나 할까?). 그는 아주 조금씩 새로운 세상을 탐험했는데, 그 한걸음 한걸음이 어찌나 조심스럽던지 보는 내가 답답할 정도였다. 우선 2층을 둘러본 뒤 1층 계단을 정복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1층에서 건물 앞뜰까지 다시 한 달, 그 뒤 다시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예전 야생동물의학 수업 때 사자와 호랑이를 비롯한 고양이 과 야생동물이 영역을 인지하는 과정을 배운 적이 있는데, 딱 그대로였다. 소중인 스스로 정한 보금자리에서 예전보다 활력이 넘쳤고, 몸의 맵시 또한 날로 날렵해졌다. 내가 한 일이라곤 단지 문을 열어준 것뿐이었다.

 

이후 나는 소중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는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했다. 실내에 속박된 고양이는 세상을 모르는 고양이일 뿐이다. 고양이로서의 본능을 마음껏 뽐낼 기회를 철저히 박탈당한 동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를 바라보는 나 또한 그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자유가 허용된 그날부터 우리 사이엔 추억이 부쩍 많아졌다. 소중인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건물로 돌아오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새를 잡기 위해 그 높은 나무를 올랐다(인터넷 사진으로나 볼 수 있던 바로 그 모습 말이다!). 그는 외출할 때면 갖은 종류의 곤충을 입에 물고 돌아왔는데, ‘작은 설치류와 곤충이 야생에서의 주식이라는 수의학 원서 내용 그대로였다(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는 살아있는 상태의 먹이는 절대 먹지 않았다. 완전히 죽은 후에야 만찬을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거나, 발로 툭툭 치며 가지고 놀곤 했다. 내겐 이럴 때 녀석이 가장 섹시해 보인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집에서 보이는 행동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분명히 확신하건데 자유를 누리는 고양이는 길고양이에게 평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고양이를 실내에만 두고 함께한 사람이 쉽사리 느낄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를 터.

 

고백하자면, 나는 그 동안 길고양이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무심한 수의학도였다. 수의대의 임상수업은 보통 개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해부에서부터 내과, 외과를 비롯한 임상실습, 대학병원 로테이션까지 온통 개 위주의 학습이 이뤄진다) 개인이 스스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저 책으로만 고양이를 아는 수의사가 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머리로만 고양이를 알지 실제론 고양이와 먼 수의사가 되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나 또한 스스로를 Dog Person(서양에선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우스갯소리로 Dog Person, Cat Person이라 지칭하기도 한다)으로만 여겨왔다. 누군가 내게 고양이 좋아하세요?’하고 물을 때면, 실제론 관심조차 없었음에도 수의사라면 모든 동물을 사랑하지 않겠어? 고양이도 물론 마찬가지지라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하곤 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소중일 덥석 구입한 거였다.

 

언젠가부터, 나는 길고양이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어떤 계기가 있던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소중이가 계기였다고나 할까. 길을 나설 때면 문득 길고양이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특히 내가 지난 2년간 생활했던 진해 군부대 주변엔 길고양이가 꽤나 많았는데(내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 주변엔 길고양이가 없었다. 그들은 주로 식당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로 등장한 검은 새끼고양이들, 피부병을 앓고 있던 노란 고양이(근무지의 터줏대감으로 짬 타이거라 불렸는데, 항상 입원병동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예전에 블로그에 녀석 피부병에 관한 글을 올린 적 있다), 이 짬 타이거를 보좌하던 회색, 얼룩무늬 고양이. 항해를 시작하기 전, 일 년 만에 다시 방문한 그곳은 모두가 그때 그대로였다(새로운 얼굴도 보였는데, 예전 새끼고양이가 커서 못 알아본 거일수도).

 

관심이 간 건 군부대 길고양이뿐이 아니었다. 도심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 또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볼 때마다 든 생각은 과연 저들은 행복할까?’였다. 분명 군부대 길고양이는 척박한 도심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보다 확실히 행복해 보였다. 요즘 나는 군부대 길고양이가 실내에 속박된 채 살아가는 고양이보다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드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심의 길고양이와 가정의 고양이는? 솔직히 나는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쉽게,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다.

 

 

 

 

길고양이는 말 그대로 고통 받고 있다. 신선한 물과 음식, 따뜻한 보금자리 없이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인간성은 이미 극에 달했는데, 이는 종종 길고양이를 희생양으로 내몰고 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주기적으로 길고양이 학대사건이 메인뉴스를 장식하고 있으며, 때로는 도리어 언론이 길고양이를 유산과 자살의 주범으로 낙인찍기도 한다. 사람들은 도심의 자동차를 비롯한 각종 현대화의 산물이 내뿜는 소음엔 무감각하면서도 유독 고양이 울음소리엔 날카롭게 반응한다. 인간 이외의 존재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공존의 미덕은 잊어버린 지 오래인 이 사회에서 고양이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나는 이 모든 걸 부정하지 않는다. 고양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간은 비록 짧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만 종합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길고양이를 위해 몸소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는 그렇게 많은 분이 계신지도 그 동안 전혀 몰랐다. Cat Mom이라는 단어는 어떤 관념으로만 알고 있었지, 그들을 접하고 나 또한 Cat Father가 되어 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고양이 전문가다. 길고양이의 습성과 행동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이다. 그들 앞에서 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데, 고작 내가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의학적 지식뿐이기 때문이다(수의사는 물론 의학적 지식에 충실해야 하지만, 동물의 습성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도심의 길고양이가 가정의 고양이보다 불행한지 여전히 확언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물이 바로 고양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에 분개할 사람이 많을 줄로 안다. ‘길고양이가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망언을 하다니! 우리는 길거리에서 고통 받는 길고양이를 하루에도 수도 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구조해 가정에서 따뜻하게 보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이 모든 것을 때려치우란 말인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나는 고양이라는 동물의 특성을 바탕으로 오늘날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다시 재조명해 보려는 것뿐이다. 고양이를 이야기할 때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우리 속담이 자꾸 떠오른다. 내 생각이 왜곡돼 전달되지 않도록 다시금 주의를 기울이며, 스트레스가 고양이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내 출발점을 명확히 하려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당신도 이미 눈치 챘을 터.

 

 

 

 

 

다들 아시다시피, 혹은 아시는 것 이상으로 고양이는 스트레스에 굉장히 민감한 동물이다. 수의학 서적을 펼쳐 고양이 질환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스트레스와 관련된 질환을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다(물론 모든 질환이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도 마찬가지. 하지만 스트레스가 고양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왜 사자는 충치 하나로 인한 스트레스로 목숨을 잃는다고도 하지 않은가). 이중엔 간지질증Feline Hepatic Lipidosis이나, 하부요로기계질환Feline Lower Urinary Tract Disease와 같이 생명을 위협할 만한 질환도 다수 있다.

 

20124, 나는 영국에서 열린 한 수의사학회에서 전율을 느꼈다. 학회 셋째 날은 몹시 기대되는 날이었다. 바로 저명한 고양이 비뇨기계 질환 전문의인 Denis Chew교수의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D. Chew교수의 사인을 받기 위해 출국 두 달 전에 그의 저서를 구입했는데, 책이 닳도록 읽을 수밖에 없었다. 공부한 흔적 없는 책을 내밀 순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그의 사인을 받는데 성공했는데, 한국에서 왔다니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 꼭 방문하고 싶어요. 당신이 그때 안내해 주면 되겠네요?’ 물론 의례상 한 말이겠지만 나같이 풋내기 수의사에겐 잊히지 않는 말이다). 그날의 수업주제는 고양이특발성방광염Feline Idiopathic Cystitis. 특발성이란 단어는 흔히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의학용어인데, D. Chew교수는 이 질환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양이특발성방광염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스트레스에 있으며, 이 스트레스는 단순히 방광뿐만 아니라 뇌에서부터 심장, , 신장 등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친다고 역설했다. 결국 고양이특발성방광염은 스트레스로 인해 나타나는 질병 총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선 고양이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가 고양이가 어떤 동물인지 이해해야 가능하다. D. Chew교수는 고양이특발성방광염의 다른 말인 FUS(Feline Urinary Syndrome)보다는 FUS(Feline Under Stress), 혹은 Pandora Syndrome이 적절할 거라 덧붙였다. 스트레스가 미치는 총체적 현상을 빗댄 말이었다.

 

D. Chew교수는 스트레스가 고양이 건강에 미치는 병태생리학적 영향에 이어, 이를 줄이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말 끝도 없이 이어졌는데, 갑자기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물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큰 한숨을 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연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로 그 말이었다.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사실 고양이가 인간과 함께한다는 그 자체가 가장 큰 문제지요.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고양이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양이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려 애쓰고 있지만, 그 모든 건 사실 그들을 자유롭게 하면 단 한 번에 해결될 거였다. 고가의, 다량의 타워나 스크래치는 결코 자연을 대신할 수 없다. 집안의 고양이 수보다 +1~2개의 화장실을 둬야 한다고? 우리 인간과 실내에서 살아야만 하는 인위적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자구책에 불과하다. 결국 수의사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조언은 밖을 허용해라일지도 모른다. 꼭 화장실 밖에, 혹은 혈뇨를 볼 때와 같이 표면상에 문제가 보일 때만 어떤 질환 상태를 의미하진 않는다. 실내에 꼭꼭 갇혀 생활하는 순간순간 고양이는 스트레스라는 정신장애상태에 빠져 있으며, 이는 신체 곳곳에 암암리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D. Chew교수는 이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그 또한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하고 있는데, 모두 자유롭게 마당을 넘나드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런 문제인식 없이 동물의 행동을 그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여기서 동물의 행동은 비단 고양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예로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보이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우리는 정상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17세기 철학가 데카르트는 동물을 아무런 의식 없는 기계와 같은 존재라 여겼다. 그는 흥미롭게도(혹은 안타깝게도) 자신의 생각을 고양이를 예로 주장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고양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실제 그들의 움직임은 생리작용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식이었다. 당신은 어떤 무미건조한 일을 반복할 때 무의식 상태에 빠져든 경험이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바로 그 상태가 동물 의식의 총체라는 거다. 무모한 절대성과 확실성에 근거한 그의 철학은 오랜 세월 시대를 지배해 왔는데, 분명 오늘날 우리 세대의 사고에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고양이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D. Chew교수의 말은 혹시 데카르트를 겨냥했던 건 아닐까?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 챈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실내에 감금된 채 살아가는 고양이에겐 자유가 없다. 개에 비해 야생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양이에게 이와 같은 삶은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그들은 하루 대부분을 스트레스 속에 살아간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실내에서 생활하는 고양이에겐 다른 측면의 안전함이 제공된다. 예방접종이나 건강검진을 통해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으로부터 보호받고, 또 치료받을 수 있다. 사람과 차량, 추위와 더위를 피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고양이와 다툴 일도 없다. 또한 신선한 물과 양질의 음식도 얼마든지 제공된다.

 

 

 

 

반면 도심의 길고양이에겐 자유가 있다. 그들은 가고 싶은 곳을 자신만의 영역을 기점으로 마음껏 활보할 수 있으며,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 교배하고 출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비록 난산으로 인해 태아와 산모 모두의 생명이 위협받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하지만 도심의 길고양이는 언제나 가파른 낭떠러지를 뒤로 한 채 살아간다. 배고픔, 추위와 더위, 각종 질환에 시도 때도 없이 생명을 위협받으며 살아간다. 그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존재는 인간이다. 어떤 인간을 이웃으로 만나냐에 따라 존속이 결정된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고양이와 반려함은 단지 그들에게 제공하는 음식과 보금자리, 의학적 지원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을 실내에 속박한 채 함께함을 표현하기에 반려라는 단어는 분명 적당치 않다. 그렇다면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결국 모든 실내의 고양이에게 외출을 허락하자는 것일까? 내 답변은 그래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이다. 오늘날 도심에서 실내의 고양이에게 자유를 허락함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수많은 인파와 차량, 길고양이(길고양이의 영향은 물론 인파와 차량에 비하며 매우 미미하다)로 뒤덮인 도심에서 당신 고양이는 스스로의 영역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도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내 차갑고 혼란스런 도심으로부터 더 큰 스트레스와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될 터. 이를 지켜보는 사람 또한 면도날 위에 서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자유롭게 생활하는 소중일 흡족하게 바라보면 살던 2012년 겨울,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 오전이었다. 사무실에 사복을 입은 누군가가 찾아왔는데, 그는 과거 이곳에서 근무했던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허탕을 친 그가 떠난 지 두어 시간 지났을까, 행정부에서 연락이 왔다. 당장 부장실로 오라는 거였다. 부장님은 소중일 서울로 보내던지,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사무실에서 없애라고 말씀하셨다. 오전에 찾아왔던 그 사람은 알고 보니 감찰 쪽 사람이었던 것이다. 규율에 의하면 개인 소유의 동물을 근무지에서 키울 수 없다고 한다. 수의사는 예외로 봐줄 수 있지 않느냐며 항변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따지고 들어가면 할 말이 없었기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지 않나.

 

그렇게 소중인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예전의 나처럼 고양이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셨고, 더욱이 그 세대 분들이 으레 그렇듯 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소중에게 빠져드셨다. 내가 그러했듯이. 다행스럽고 기뻤다. 우리 형제는 당시 모두 군복무를 하고 있어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홀로 남겨진 그들에게 소중인 어떤 활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에게서 자유를 앗아갔기 때문에.

 

처음 나와 함께했을 때처럼 소중인 다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현관문 앞에 턱하니 버티고 앉아 야옹~, 야옹~’하며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조르기 일쑤였다. 스트레스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건강 또한 예전보다 나빠졌을 터. 어쩌면 계속해서 안 좋아질 수도. 한 번은 그에게 밖을 허용해 보기도 했다. 우리 집은 4층 상가건물의 맨 위 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는 우선 옥상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야금야금 점점 활동범위를 넓히더니 어느새 옥상을 장악했다. 그러나 옥상은 또 하나의 실내에 불과했다. 그는 딱 예전처럼, 진해에서와 같은 삶을 원하고 있었다. 그 다음 주에는 옥상은 거들떠도 안 보고 아래층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3, 2, 1. 더 이상은 도저히 허락할 수 없었다. 상가건물인지라 2층과 1층엔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건물 바깥세상은 더욱이 적합하지 않다. 차와 사람이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길고양이 또한 엄청나게 많다. 혹여나 건물 문이 닫히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이 여닫이문은 예전에 한 고양이 가족의 생이별을 초래한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인간의 '선의'가 때론 '악의'일 수도글에 담겨있다. 또한 어릴 적 나는 교통사고로 개를 잃은 경험이 있다).

 

결국 자유를 보장해 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고양이와 함께하고 싶어, 나는 수의사니까 당연히 동물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 물론 행복하게 해줘야지와 같은 짧고도 안일한 생각에 덥석 한 생명을 구입했던 것이다. 이는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결코 입양이 아니었다. 이렇게 실내에서만 소중일 둬야하는 현실이 가지는 의미를 내가 그 전에 알았더라면 과연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나는 결코 그에게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군복무 중이었으며 전역 후엔 도심에서의 삶을 계획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진해에서 그에게 바깥세상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깨진 창문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우연찮은 기회에 이를 통해 고양이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뿐이지 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길고양이는 분명 도심에서 혹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기고문 인간의 '선의'가 때론 '악의'일 수도에서 길고양이에게 도심은 또 하나의 야생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가끔 이 야생은 지옥에 가깝게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은 실내에서의 삶도 고양이에겐 가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차단은 결코 유토피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과 함께한 역사는 개의 그것에 비해 그리 길지 않다. 혹자는 숫자를 들이대며 고양이 또한 개와 그 역사를 함께한다며 이를 부정하려 할 테지만(실제로 고대 이집트와 같은 유적에서 고양이의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아직 지니고 있는 야생성은 우리가 그들을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할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결코 혼자 사는 여성이 키우기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당신이 하루를 직장, 학교, 유흥가에서 보내고 있을 때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시간을 보내는 동물이 아니다. 홀로 남겨진 그 시간 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신체 기간 하나하나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고양이에게 특히 유별난 그 스트레스)라는 이름의 늪에 빠져 있을 것이다. ‘늪에 빠져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음에 주목하라. 기다린다는 표현은 개에겐 적합한 말일 수 있다. 고양이에게 우리와 함께함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이 돌아와도 어느 순간 고양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 숨 쉬고 있을 테니까. 그들은 바로 그런 존재다.

 

아마도 당신은 지금 이 사람, 도대체 뭐 하는 수의사인가. 그럼 고양이와 함께하지 말라는 건가? 우리 모두는 고양이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건가? 왜 이리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이야? 현실성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상주의자구만. 자유를 보장해 줘야 한다면서 도심에서는 안 된다고, 길고양이에겐 자유가 있다면서 그들 또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니, 고양이는 그럼 어디에서 살라고! 무엇보다 당신도 당신 고양이를 결국 실내에 가둬두고 있잖아!’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하지만 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아무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 주제를 공론화하는 자야 말로 현실주의자일 터. , 그럼 내 이야길 끝까지 들어보길 바란다.

 

최근 들어 급증한 도심 길고양이의 중심엔 바로 가정으로부터 유기된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의 야생본능과 유연한 신체, 그리고 독특한 발정주기는 그들로 하여금 이 척박한 도심에서도 살아남게 했다. 문제의 본질은 바로 유기되는 고양이에 있는데, 이는 우리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려동물과 함께함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하는지 절실히 깨닫지 못한 채 오늘날 수많은 동물이 '구입'되고 있다. 우리가 소, 돼지와 같은 산업동물을 한낱 상품, 소모재로 인식하듯(이 또한 큰 문제인데, 거대 축산업의 문제에 관해선 본 글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반려동물 또한 지폐 몇 장으로 내 소유로 삼을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암담한 현실을 타파할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다음은 잉글랜드 호수지방에서 만난 남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가 저 멀리 보였다. 막차를 놓치면 두 시간가량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야 했다. 있는 힘을 다해 뛰어 버스에 올라탔는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전에 버스기사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내 뒤를 가리켰는데, 한 남자가 그의 개와 함께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버스를 타기 전에 개의 목줄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를 알지 못한 채 그만 새치기를 하고 만 거였다. 민망함에 몸을 감출 줄 몰랐다. 나는 그 남자와 버스기사에 미안함을 표현했는데, 진심이 전해졌는지 그들의 당황했던 표정은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남자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개는 그 앞에 얌전히 앉아있었는데, 이름은 렉시였다. 그에 따르면 렉시는 RSPCA라는 영국의 동물보호단체에서 입양한 아이라 한다. 그곳으로부터 반려동물을 입양하기 위해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먼저 그가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여가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하나하나 확인한다고 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그와 함께할 아이가 결정되는데(그가 아이를 정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바로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보호소에 얼마 동안 주기적으로 방문해 입양을 위한 자신뿐 아니라 아이에게도 새 삶을 시작할 준비시간을 준다(우리나라에서 동물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준다는 말을 했다간 미친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이곳에서는 이러한 대화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에 따르면 반려동물과 함께하길 원하는 이들에겐 가장 첫 번째로 유기동물 입양이 권장된다고 한다. 영국인이겐 버려진 동물을 입양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루만져 줌이 반려동물과 함께함에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는 반면, 상품화된 동물을 돈을 주고 사는 행위는 그리 떳떳한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무르익은 것이다.’

 

이 과정 하나하나가 마치 사람 고아원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바로 그에 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과 함께하는 삶이 개와 고양이에겐 우리가 생각하듯 그리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 사회엔 책임 있는 보호자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건 책임이 반려동물을 행복하게 하는 절대요소가 아니란 점이다. 책임으로 무장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자유란 분명 한계가 있다. 특히 고양이에게는 더욱.

 

이렇듯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가득해도 모자랄 판에, 무책임한 보호자를 양산하는 암초가 있다. 바로 아무런 기준 없이 반려동물 개체 수를 끊임없이 증가시키는 행위. 이는 준비되지 못한 사람에게 반려동물을 손쉽게 구입할 기회를 제공할 뿐이며(반려동물이 상품으로 전락한 오늘, 개체 수 증가는 곧 반려동물 판매행위를 말한다), 결국 유기동물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다. 이는 분명 비난받아 마땅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반려동물과 함께하고 싶을 때 모두가 가장 먼저 유기동물을 떠올린다면? 분명 상황은 바뀔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유기동물은 크게 줄 것이다. 또한 유기동물이 그들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따스한 손길을 줄 수 있는 보호자를 엄격한 기준에 의해 가려낸다면(나는 분명 탈락할 것이다), 불가피한 상황을 최대한 피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 보호자는 반려동물과 함께함에 있어 항상 나름의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결국 모든 반려동물이 해가 갈수록 줄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동물만이 지금보다 훨씬 적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유기되는 고양이 없이 길고양이 수는 그들 나름의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만 유지될 것이다(길고양이 수를 조절하기 위한 인간의 개입은 분명 최소화되어야 한다). 실내의 고양이 또한 크게 줄 것인데, 그들의 삶은 한껏 자유에 심취해 있을 터. 아주 간단한 생각 아닌가. 책임 있는 보호자에게만 반려동물을! 가장 먼저 유기동물을! 안 될게 무엇이 있는가? 반려동물을 키울 자격을 뺏어간다며 비난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무책임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꼴일 테니까. 더 이상 입양할 유기동물이 없으면 어찌 하냐고? 그런 상황이 제발 왔으면 좋겠다. 입양할 수 있는 유기동물의 수가 줄어들수록 반려동물과 함께하는데 더 높은 자격이 요구될 테니.

 

이 모든 걸 실현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반려동물 판매행위를 금지해야 한다. 동물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의식이 어느덧 성숙해 법으로 정하지 않아도 유기동물을 가장 먼저 찾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날이 언제 올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반려동물 판매행위자체가 동물을 상품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을 더욱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반려동물 판매행위가 금지될 때, 유기동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엔 큰 개선이 있을 터. 단지 시간에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고가 행동을 이끌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로운 행동이 올바른 사고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했을 때, 우리는 어느덧 고개를 돌려 거대 축산업의 횡포에 짓밟히고 있는 가축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 판매행위가 금지되고 유기동물의 입양의 엄격한 기준이 바로 설 때, 더 이상 반려동물은 돈을 주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을 때, 동물복지를 위한 사회의 제도적 뒷받침은 너무도 손쉽게 이뤄질 것이다. 오늘날 동물기본권을 위한 입법이 항상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바로 인식의 차이에 있다. 동물을 상품으로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당신은 무엇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반려동물 판매행위의 금지라 본다.

 

한편으론 이러한 계획은 한 가지 맹점을 안고 있는데 바로 돈 없고, 시간에 쫒기는 사람은 대상에서 철저히 소외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유기동물을 입양할 수 있는 자격조건이 엄격해 질수록 자연스레 보호자 될 사람의 생활여건을 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반려동물에겐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자금,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마당을 소유한 보호자가 아무런 여력이 없는 보호자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이 부분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묘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는 오히려 너무 이상적인 접근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함은 사람 아이를 입양함에 준해야 함엔 당신도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함께함에 많은 돈과 시간이 듬을 인정하지 못할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반려동물 유기에서 금전적인 면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한없이 따뜻한 감성과 동시에, 차가운 이성을 마음에 지녀야 한다(강조하건대,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더욱). 반려동물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생명인 만큼 보통 십 년이 넘는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덴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이 든다. 사람들은 물론 반려동물을 구입하기에 앞서 이를 고려하기는 한다. 다만 초기 예방접종 비용과 한 달에 사료 값이 얼마나 드는지 계산하는데 급급할 뿐. 반려동물도 아플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여기엔 큰 비용이 따름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생명을 생명으로 바라보지 못해 생기는 안타까운 일이다.

 

혹자는 돈과 시간이 책임감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반문할 테다. 나 또한 위 두 문단을 써가며 얼마나 내 자신이 차갑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여전히 명료하다. 반려동물은 소유를 선택할 수 있는, 보장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자녀를 가질 때, 혹은 입양을 할 때처럼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반려동물과 함께함을 진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엔 자연히 돈과 시간이 결부될 수밖에 없으며, 이들의 절대성은 곧 우리의 책임감에 의해 상대성을 띄게 된다.

 

결국 어떤 궁극적인 가치가 있을 때만 반려동물은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 나는 진해에서의 소중일 바라보며 이를 발견했지만, 서울에서의 그를 보고 있자면 괴로운 마음뿐이다. 그를 통해 나와 우리 가족은 즐거움을 얻지만 이는 결코 순수하지 못한 무엇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반려동물과 함께함에 있어 더욱 엄격한 규율이 우리에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성숙치 못한 우리의 의식은 아무런 제동장치가 없을 때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차가운 바람에 의해 더욱 추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언제나 소중일 걱정하고 위하고 평생을 함께할 거라며 애써 자위할 순 있어도, 처음 어떤 도구로서 그를 [구입]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다. 이처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고 확신한다. 그나마 가장 가까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생명인 반려동물까지 완전히 소모재로 인식되는 그날, 혹은 오늘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쉬운 일은 결코 없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가득한 것처럼 반려동물과 우리 관계 또한 마찬가지일 듯하다. 이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지닌 가장 큰 고민을 나누며 글을 마치려 한다. 바로 반달이이야기다. 반달인 두 달도 채 못 넘긴 나이에 버려진 아이였다. 나는 포항에서의 군 생활을 시작하는 첫날 녀석을 발견했는데, 아직도 그때가 선하다. 작은 골판지 박스에 홀로 떨고 있던, 오밤중에 사온 편의점 전복죽을 헐레벌떡 몽땅 먹어치운 반달이, 이를 흡족히 바라보던 나. 내게 반달인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약 4개월 후, 변화가 생겼다. 소중이 때와 비슷한 이유로 서울로 보내야만 했던 것.

 

혼란스러웠다. 나는 분명 좋은 보호자였다. 단지 버려졌던 녀석을 거둔 하나만으로 생색내는 게 아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줬다. 반달인 드넓은 풀밭에서 마음껏 뛰놀았고, 땅굴을 파기도 했다. 그는 그가 생활했던 공간의 특수성 덕분에 목줄에 매인 삶을 살 필요도 없었다. 더욱이 그에겐 의무라는 소중한 친구도 있었다. 완전한 자유를 얻은 두 마리 개가 뽐내는 본능을 나는 여실히 목격했다. 언젠가 그 삶에 변화가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삶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출항하기 얼마 전, 반달일 데리고 서울에 갔다. 문제는 예상보다 컸다. 처음엔 솔직히 소중이 걱정만 했었다. 개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란 소중이가 과연 반달일 어떻게 받아들일까. 안 그래도 예전의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녀석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리란 건 눈에 보듯 선했다. 그런데 문제는 반달이도 마찬가지였던 것. 고양이라는 동물은 그가 그동안 겪었던 사람과 개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둘은 집 안에서 마주칠 때마다 날을 세웠다. 폭풍전야라고나 해야 할까. 그 긴장감이 어찌나 팽팽했던지 어머니는 심지어 진담 반 농담 반 이렇게 말씀하셨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겠어.’ 나 또한 이 상황이 너무 괴로워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격리시키기 일쑤였다.

이대로 모든 짐을 부모님, 소중, 반달에게 떠안기고 떠날 순 없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내가 모두 초래한 일 아닌가. 하지만 출항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이러한 고민을 한 지인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선뜻 내가 데리고 있을게요. 안 그래도 우리 아이 친구 만들어 주고 싶어서 누구 없나 생각하고 있었는데!’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녀는 내게 구세주와 같았다. 더욱이 내가 믿고 반달일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반달인 다행히 그곳에 적응해 너무도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진 아직도 3개월이 남았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화해? 소개? 적응? 무슨 단어를 써야할지조차 모르겠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전혀 나아질 기미 없이 출항 전과 같이 이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만약 그런 최악의 사태가 실제 일어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결국 내가 풀어야한다. 여기까지가 현재상황이다.

 

이처럼 나는 나와 함께하고 있는 반려동물에 있어 무책임한 반려자다. 누군가는 그 정도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위로할 지도,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떻게 수의사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냐며 나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갈 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나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소중과 반달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만약 반달일 처음 만난 그날 유기동물보호센터에 보냈다면?’하는 생각이 들 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로부터 선택되지 못할 땐 오히려 그를 안락사 시키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더욱이 반달인 똥개에 부정교합에 배꼽탈장까지 가진 녀석. 세상 기준에 의하면 선택받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제 글을 마치려 한다. 소중과 반달에 관해 내가 간직한 굵직한 이야기를 거의 다 했다. 최대한 나의 시선을 솔직하게 담으려 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어느덧 나를 향한 어떤 관념을 지니게 되었을 터. 만약 당신이 나를 동물을 사랑하지만 인간과 함께하는 오늘의 삶엔 때로는 회의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내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믿는다. 동물은 우리와 분명 다른 존재다. 반려동물 또한 이를 피해갈 수 없다. 개나 고양이가 인간과 함께한 삶은 길다고 이야기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도심에서 함께한 역사는 결코 길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과 함께함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막중한 책임감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그저 기다리기만 해선 결코 이룰 수 없다. 무엇보다 먼저 [반려동물 판매행위]를 금지해야만 하며, 모두가 유기동물을 반려동물과 함께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한다. 유기동물을 대하는 사회적 제도는 어떤 골칫거리를 제거함이 아닌 바로 오늘날 철저히 유린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임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시작했던 게 항해 11일째였는데, 오늘이 벌써 14일째. 너무도 보고 싶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동생, 부모님, 그리고 소중이, 반달이가.